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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천|로그정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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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천|로그정리

주화입마 금치 2020. 9. 15. 01:44

 

 

 

 

 

 

곰 세호안경 쥑여주게 그려주는데 왜 평소에안경을 안씌우는지 궁금해
나모님 갓편집 드디어 찾았다(죄송합니다 날 견뎌주세요)

 

不好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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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好불호

잔잔하게 흐르는 상류의 강물처럼 이야기를 듣던 왕천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음식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라니 필시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이 되었으나 왕 천은 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째, 왕 천은 무당파가 아닌 이들에겐 호의라 불릴 만한 것을 딱히 내주지 않았다. 이미 내사람과 아닌 사람의 선을 그어둔 탓이기도 했다. 둘 째, 설사 무당의 사람이 아닌 자에게 호감을 준다 할 지라도 그것이 '소화'가 될 수 없었다. 언행이 가볍고, 예를 실천하지 않는 이를 왕 천이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 째, 왕 천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를 잘 신뢰하지 않았기에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구태어 소화의 사정을 물어보고, 자세한 내막을 아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놀랍게도 소화는 이 세 가지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었고, 왕 천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왕 천의 사존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필시 화를 냈을 것이다. '예'를 다하는 것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행동에만 극한 되는 것이 아니다. 벌제위명伐齊爲名같은 행동은 어디까지나 예를 다하는 '척' 하는 것이다. 곧잘 왕 천이 들어오던 '가식'이 허를 찌르나 스스로 고칠 생각이 없는 그이다. 마음까지 정중히 예를 다하여야 비로소 성인成人 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이를 모르는 왕 천이 얄밉게 입을 열었다. '소협은 어떤 것 같아?'라는 소화의 물음에 답할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무당파에서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왕 천은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많았다. 뜨겁고 매운 요리를 싫어하였고, 조금이라도 간이 강하면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하물며 무당파 답게 음식에서도 균형을 찾았는데, 고기와 야채의 비율도 보는 왕 천이다. 왕 천이 싫어하는 음식을 차근차근 짚어 보라 한다면 필시 연화봉 정상까지 걸어가며 말해도 부족할 것이다.(물론 화산파와 관련된 비유는 왕 천이 더욱 싫어한다.) 그만큼 싫어하는 것이 많은 왕 천이다. 허나 입을 연 왕 천이 제일 처음 말한 것은 꽤 뜻밖의 말이었다.

 

" 입에 넣었을 때는 몹시 차가우나, 식도로 넘어가면서 뜨거워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여, 가리는 음식이 많습니다. "

 

왕 천은 그리 말을 마쳤음에도 손을 들어 제 목을 쓸었다. 갈증이 탈 이유가 없음에도 왜 인지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 들어 인상 또한 절로 찌푸려졌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소화에게도, 또한 무당파의 위신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에 곧 자세를 바로 했다. 다만 한 번 찌푸린 인상은 여전 했다. 왕 천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특유의 무표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소화. 만약 이번 일 처럼 허기가 졌다고 가정해봅시다. 소화의 앞에 처음 보는 과일이 놓여있다면 드시겠습니까. "

 

왕 천은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말았다. 필시 제 사존이 들었더라면 정신차리라며 뺨을 맞았을 것이다. 예의도, 궁색도, 위신도,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단지 감정에 잘 휩쓸리던 왕 천은 가끔 고무공 마냥 뜻밖의 길을 걸어가고는 했는데, 오늘이 그러했다. 왕 천은 내심 소화에 대한 평가를 마친 상태였다. 점창파에 소속된 무림인. 밝고 활기차며 점창파 내에서의 인지도와 신뢰도가 결코 낮지 않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였다. 첫만남에서 부터 반말로 다가왔기에 인상 점수는 제법 낮았으나, 수련에 임하는 태도는 또 진지하였다. 그렇기에 지금에서의 소화에 대해 썩 싫어하지도,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비무대회에 참가한 점창파의 문파원, 경쟁상대, 그리고 언행이 무겁지 않는 자. 그랬다, 언행이 무겁지 않은 자. 왕 천은 내심 소화가 이번 답도 가볍게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소화. 어떤 선택을 하시더라도 괜찮습니다. "

 

 

 

공포 1865 자

 

 

 

 

尾生之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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尾生之信

배움에는 끝이 없기에, 손 닿는 곳의 모든 것을 읽어내려도 부족하였다. 왕 천은 시선을 조금 내려, 홍양을 보았다. 어떤 것을 알려주어야 재미를 느낄 지, 그런 역지사지易地思之 따위는 왕 천에게 몹시 난이도가 높았다. 예의와 정의는 중시했으나, 거기에는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하기를 일 다경. 결국 왕 천이 작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홍양, 미생지신尾生之信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재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들어주시길 권합니다. "

 

서 서 얘기하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지 몰라 홍양에게 자리를 권했다. 왕 천은 맞은 편 자리에 앉아 차분히 내용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미생지신에 대한 것은 일찍이 무당산에 들어오기 전, 王가문에서 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기에 그리 내용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딱딱한 정치계, 역사의 이야기가 아닌 나름의 기승전결이 갖추어진 이야기였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 이야기는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03년 때(*중국 춘추시대)의 이야기 입니다.  당시 미생(尾生)이라는 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한 여인을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아주 덧 없는 것이었지요. 미생만의 짝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

 

왕 천의 입은 그렇게 열려, 한동안 이야기를 계속하여 담았다. 미생, 그는 바라만 보는 것을 관두었다. 이읃고 그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오늘은 기필코 말을 걸어보자. 용기를 내어보자.' 라고 말이다. 그리고 미생은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연모하던 이에게 말을 붙였다. 허나 미생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일이 진행되고 말았다. 그녀가 놀라, 미생을 피해 저 먼 곳으로 도망가버린 것이다.

 

허나 미생은 이를 망연자실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조급하기는 하였으나, 여인에게 외쳤다. '나는 당신을 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망가지 마십시오! 저의 이야기를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발 들어주십시오.' 라고 말이다. 그 외침 때문이었을까? 여인은 도망가던 것을 잠시 멈추고, 먼 발치에서 미생의 말에 답하였다. '그렇다면 내일 마을의 다리 아래에서 만나서 대화를 합시다.' 여인은 그리 말하며 해질녘의 노을 처럼 저물어져갔다. 미생은 그 말 한마디에 기뻐, 그 날 잠을 다 설칠 정도였다.

 

약속한 시간, 약속한 장소. 미생은 한참을 다리 밑에서 여인을 기다렸다. 허나 여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일 각, 한 시진, 세 시진. 어느 덧 시간은 뉘엿뉘엿 가버려 해가 사라지고 구름이 드리웠다. 화는 한 번만 닥치지 않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구름은 결국 소나기를 내렸다. 미생은 약속을 잘 지키는 이였기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혹시나 비를 피하려 몸을 옮기는 사이, 여인이 나타날 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생에 대한 미움도, 사랑도 없이 계속 내렸습니다. 결국 마을의 개천이 불어 물은 삽시간에 불어났습니다. 미생은 자신을 덮쳐오는 물을 보고도 다리의 교각을 잡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허나 그는 일반인입니다. 결국 물에 잠겨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여, 우직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약속을 굳게 지키는 것을 미생지신尾生之信 이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홍양."

 

왕 천은 제가 고르고 골라 한 이야기 였음에도 개운치 못한 속내를 눌렀다. 융통성이 없다. 미련할 만큼 약속을 지키고, 굳건히 자신만의 정의와 신념을 지켜나가는 미생지신은 비단 왕 천이 많이 들어왔던 성어였다. 허나 타 문파의 이에게 이를 드러낼 생각을 조금도 없었기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특유의 무표정으로 홍양에게 마저 말을 하였다.

 

" 다른 고사성어도 능숙히 말씀 하시게 된다면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홍양께서는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같은 무당파의 문파원은 잘 아나, 다른 문파의 이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알려주신다면 좋아하는 것을 준비해보고자 합니다. 허나 홍양, 외우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적절한 때에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와 대화 하실 때, 조금 씩 사용해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려우시다면 기각하셔도 됩니다만, 혹 마음이 변하신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지요. "

 

배우고자 노력하는 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멈춰서 있기 보다는 달려나가는 이에게 더 시선이 가는 왕 천이었다. 도와주기를 청 하는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가지의 것이 전부 왕 천에게 마땅한 것들이니, 선물을 준비하는 것 쯤이야 대수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화산파의 이가 아니라면 더욱 더 그러하였다. 그랬기에 표정은 다소 가식이었으나, 어투 만큼은 날카롭지 않았다.

 

공포 2221 자

 

 

 

 

 

 

華胥之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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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胥之夢

乌头

 

 

종종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할 때가 있다. 그 날이 그러하였다. 왕 천은 일찍이 오늘 치 배워야 할 것들을 해치웠다. 王 가문의 사람이기에 무예 이외에도 여러가지를 학습하였다. 도법, 권각법, 서책 공부가 그러하였다. 이미 왕이라는 성씨를 가졌기에, 필연적으로 무당에 들어갈 것이 틀림없었음에도 가문을 세운 '효진'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배움에는 끝이 없고, 넓고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하여 왕 천은 그 날도 제 몫의 공부를 마쳤다.

 

다만 왕 천은 다소 특이한 것에 관심이 있었다. 무림인이 될 것인데도 구태어 약초학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 때문에 무당파에 입문해야 할 연배에도 가문에 남아 약초학을 공부하였다. 지금의 왕 천에게 '왜 약초학을 시작하게 되었나?'라 묻는다면 필시 말을 돌리거나 교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왜? 이미 왕 천은 그 이유를 잊었기 때문이다. 허나 당시의 왕 천은 제법 재능이 탁월했다. 약초의 종류를 책에서 보았을 뿐인데도 척척 분류하였다. 외우는 것에 능했던 것일 수도 있다. 허나 당시의 왕 천은 자신이 특출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야랑자대夜郞自大의 표본이니, 오늘 날의 왕 천은 어릴 적 자신의 얘기를 꺼렸다.

 

" 이것은 운지버섯, 한약탕에 자주 들어가는 것이니 따두었다 끓일 때 넣어봐야겠군. "

 

이미 어릴 때 부터 과묵한 척 하기를 좋아하는 왕 천이기에, 말투마저 얄밉기 그지없었다. 무표정에 매서운 인상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릴 적의 왕 천은 되다 만 머리카락 색이 아니었다. 칠흑같은 머리색의 그 어디에도 다른 색이 묻어있지 않았다.

 

" 이건 ... 미나리인가? 들에서 피는 것도 있다고는 알았지만, 이런 곳에서도 자랄 줄은 몰랐거늘. "

 

 

 

왕 천은 그것을 마저 채집하고 길을 서둘렀다. 산에서의 시간은 평지에서와는 달리 해가 더 빨리진다. 집에 도착한 왕 천은 제일 먼저 채집해온 약초와 버섯을 구분하였다. 책에 그려진 것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또 직접 먹어도 보았다. 생으로 섭취하면 안되는 것은 달여서 먹었고 말려서 보관하기도 하였다. 허니, 가문의 사람들은 왕 천이 무당파가 아닌 다른 문파에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왕 천이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왕 천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왕 천'이기에 스스로가 무당파에 들어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왕 천이 무당파에 들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사고가, 사건이 있었다.

 

왕 천이 미나리로 알고 함께 끓인 것이 문제였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그것은 미나리가 아니었다. 선명한 녹 빛이 미나리의 그것으로 착각 되기 쉬우나 그것의 이름은 미나리, 그 석 자가 아니었다.

 

" 아 ... "

 

乌头 , 그것의 이름은 초오두(투구꽃)다. 유명한 독초임에도, 꽃이 피기 이전 까지는 그 모양새가 제법 미나리와 쑥을 닮았다. 유능한 의료인들 조차도 꽃이 나지 않은 어린 초오두를 구분하기 어려워 하였다. 허니, 아직 배움이 부족한 왕 천으로서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束手無策 , 소량이기는 하였으나 달여 마셨으니 그야말로 '사약赐药 '이었다. (*실제 초오두는 사약의 재료이다.)

 

눈이 멀지는 않았으나 왕 천의 마음만큼은 멀어졌다. 죽음의 고비에 올랐기에, 칠흑같던 머리카락은 백색으로 더럽혀졌다. 분명 차갑게 식힌 것을 삼켰음에도 목을 타고 흐르는 것은 용암처럼 뜨거웠다. 발견이 빨랐고, 아주 어린 초오두였기에 생을 달리 하지 않았다. 왕 천은 오늘 날, 그 일이 몹시 운이 좋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자란 초오두를 달여 마셨더라면 머리가 아닌 눈이 멀었을 것이며, 종국에는 다신 숨을 내쉬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 였다. 그 무렵이었다. 왕 천의 마음이 멀어져, 북쪽의 차가운 바람처럼 떠돌고 있을 때 였다. 지금의 사존을 만난 것은 왕 천의 가장 큰 시련과 고비의 낭떠러지에서 였다. 죽음의 고비는 넘겼으나 왕 천의 몸은 지독히도 약해졌다. 이전의 상태로 돌아올 가능성은 전무하니, 가족도 가문의 이도 왕 천을 보지 않았다. 허나, 그의 사존만이 왕 천의 손을 잡아주었다.

 

" 내가 가르쳐 주마. "

 

 

 

" ... ... "

 

" 네가 널 믿지 않더라도, 내가 너를 믿어주마. 네가 의심하는 것은 내가 전부 믿어주마. "

 

하여, 왕 천은 원래도 무당파에 입문할 생각이었으나 더욱 무당파에 입문하고자 하였다. 유일하게 손을 잡아준 이였기에, 왕 천은 사존을 신뢰하였다. 그 때의 고통을 모두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존을 만나기 위해 다시 한 번 그 모든 과정을 견디라 한다면 필히 견딜 것이다. 자신의 믿음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어주는 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왕 천은 2년의 요양을 마치고 기다렸다는 듯 무당산으로 갔다. 속세에 대한 미련이 없었고, 가문에 대한 미련은 더욱 없었다. 낳아주고 길러준 곳이기에 예는 지키나 그 어떤 정도 붙이지 않았다. 가족보다도 제 사존이 중하였다. 장구지학章句之學 하였던 과거를 가문에 두고, 왕 천은 무당파에 녹아 들었다. 다만 가문과 무당파가 긴밀하니, 탈 속세를 지향하여도 결국 가문의 장신구를 달고 가문의 일을 입에 담아야했다. 하여, 무당산에서 왕 천이 王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  王가문의 사람이면 뭐 해? 비실해서, 깃털이 아니었으면 다른 왕 씨 인줄 알겠어."

 

이러한 말은 친하지 않은 무당파의 이로 부터 들었으나, 애초에 가문에 어떤 애정도 없고 속세를 멀리하는 왕 천이기에 딱히 나서지 않았다. 사소한 분란을 일으켜 제 사존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사존의 체면과 위엄이 중했다. 하여, 왕 천은 사존께 찾아갔다. 왜 인가 하였더니, 이어진 말이 문제였다.

 

" 저런 녀석을 키우겠다는 사존이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야. 혹, 모르지. 재능 없는 자이기에 제자 또한 자신의 실력보다 낮은 녀석으로 받은 걸지도. "

 

당장 나서 꾸짖고 싶은 마음이 반, 다시는 모욕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침으로 꿰고 싶은 마음이 반. 허나 왕 천은 한계까지 감정을 누르고 눌러 제 사존에게 찾아갔다. 다시는 그러한 말이 문파에서 돌지 않도록, 스스로가 증명하고자 하였다. 사존은 남을 백안시白眼視하지 않으며, 실력이 출중하다. 자신을 거둔 것 또한 사존의 넓은 아량이며, 베품인데 어찌 그 실력을 의심한단 말인가. 이후, 사존에게 비무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왕 천의 다소 독단적인 말에도 사존은 그저 웃기만 하였다. 무당산에 오른 뒤로, 왕 천이 먼저 나서서 무엇을 하고 싶다 밝힌 적이 있었던가? 처음으로 의사를 밝히는 왕 천이 사존은 뿌듯했다. 사정이야 어떻든, 비무대회에는 다른 문파의 제자들이 모인다. 다양한 무림인을 보며 한층 성장할 제자 생각에 사존은 왕 천의 참가를 허락 하였다. 

 

" 제자 왕 천, 무당파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그래, 최선을 다하되 결코 무리하지 말거라. 또한 결과보다 이 사존은... 네가 많은 경험을 하고 오길 바란다. 그래, 돌아오는 길에 작별을 고할 친우를 사겨 오는 것도 좋겠구나. "

 

이것이 왕 천이 비무대회에 참가하게 된 계기였다. 자신이 아닌, 사존의 위신과 명예를 위하여. 그러니 비무대회에 모인 이들과 대화를 거듭할수록 왕 천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입으로는 진실이나, 진실이 아닌 거짓을 담았다. 열이면 열, 모두에게 참 된 계기를 밝히지 않았다. 스스로도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 이었다. 독초의 영향으로 인해 무당파의 사람임에도 방어에 제약이 걸려있었다. 시간은 적었고, 모인 이들이 제 생각보다 예사롭지 않았으니 근심이 깊어만 갔다. 허나 사존께서 경험을 쌓아오라 하였으니, 마냥 근심의 호수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여, 왕 천은 최고는 무리더라도 늘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다. 사존의 말씀대로 많은 경험을 하고자 하였다. 무당산에서라면 자중하였을 것도 해보았고, 답지 않게 나서기도 하였다. 비무대회는 왕 천에게 있어 먼 훗날 잊어버릴 화서지몽華胥之夢 이기에 가능한 것들 이었다.

 

 

 

공포 3936 자

 

 

 

 

 

 

 

 

 

會者定離 去者必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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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者定離 去者必返

旣約

 

 

왕 천은 권각법을 사용하는 무당파의 일원 이다. 허나 마지막 날, 이곳에서의 마지막 수련이기에 도를 집었다. 도를 쓰지 않고 오직 몸을 구사하여 무예를 닦는 것이 가문에서 배운 '도리'였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았고, 미련을 남기고 싶었다. 비무대회는 왕 천에게 있어 좋은 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호북 무당산으로 돌아가면 자연스레 잊고, 수련에 임해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했다.

 

처음부터 알지 못했더라면 몰랐을까, 떠들썩하고 다소 짗궂은 이들을 만나 재밌었다. 이것이 왕 천의 진심이었다. 도를 휘둘러 초식을 이어 나가면서도 만났던 이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화산파의 이들은 특히나 얼굴이 기억에 남았는데, 비무대회에서 첫 합을 겨룬 사련은 잊을 수가 없었다. 같은 의료의 길을 걷는 이 답게 예의가 정중하며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수련의 경지 또한 결코 낮지 않았기에 내심 화산파의 삼대제자라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였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이는 유량화, 그 석자 였다. 유비의 유씨를 가진 유 소협. 늘 무엇을 생각하는 지, 그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실력이 좋았다. 허나 어째서인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고사에 능통하여 학사 같으니, 스스로도 더욱 학문에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만약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또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니라.

 

그는 조금 특이했다. 날이 선 듯 싶은데, 자신의 사람에게는 한 없이 따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는 품행을 보아서는 도저히 구파의 일원이라 볼 수 없었으나, 그의 실력 하나만큼은 명실상부한 화산파의 그것이었다. 이름 두 자가 세호라 하여, '형세 세'에 '범 호'를 쓰니 말 그대로 범 같았다.(욕이 아닌 왕 천, 나름대로의 칭찬이다.) 당돌하기는 화산파에서 둘 째 가라면 서운해 했을 그는 같은 문파생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였다. 무당파의 (...) 적적한 분위기와는 달라 왕 천도 내심 부러워했다. 그 또한 다음이 있어 만나게 된다면 어찌 그런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지 여쭈어 보아야겠다고, 왕 천은 생각했다.

 

엽시호는 늘 부지런하였다. 수련을 게을리 하는 왕 천이 아님에도, 늘 수련장에는 엽시호가 있었다. 매일 꾸준히 수련을 하니, 필시 비무대회에서 승리하지 못하여도 그는 장차 화산파의 주축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화산파에서 실력이 특출난 몇을 매화검수라 일컫는데, 왕 천은 그것이 엽시호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별이 아쉬우나, 화산과 무당의 사이가 멀다. 관심은 있으나 끝내 다가가지 못한 왕 천 이었다.

 

호리병에 든 것이 과연 물 인지 술 인지. 결국 왕 천은 그 진실을 알지 못했다. 허나 취한 듯 휘청이는 현천랑의 실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만 왕 천은 이런 성격의 이를 어려워 하였다. 능글 맞기 그지없고 예의를 차리지 않는 현천랑이기에, 몇 마디 말을 나눠보지 않았음에도 얼굴이 굳었다. 다만 그 실력 하나만큼은 관심이 있었기에, 훗날 그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시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도를 휘두르다 그만 도를 놓쳤다. 뒤를 지나가는 현무진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왕 천은 다행히 몸을 비틀어 도를 던지는 반격으로 몸의 중심을 찾았다.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고 생각한 순간 흙이 미끄러져 결국 지면에 둔부를 찧었다. 한숨을 내쉬면서도 도를 찾아 집어들고는 현무진인에게 정중히 포권을 하였다. 민망한 상황임에도 현무진인을 그럴수도 있지 암 그렇고 말고! 노도는 다 이해한다 홀홀 하며 저 멀리 사라졌다. 다시 도를 고쳐쥐고 왕 천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허나 자세를 가다듬어도 마음은 그러지 못하였다.

 

하필 현무진인과 마주쳤기 때문일까. 내기의 기억이 떠오르니, 자연스레 에율단리가 생각났다. 언행이 썩 가벼웠기에 가까이 하지 않았으나, 내기에서 보이는 추진력 하나만큼은 가히 대단하였다. 필시 화산파의 문파생이 아니었더라도 예율단리가 웃으며 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스치듯 본 예율단리의 인상이 그러하였다. 바람가는 대로,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내심 부러웠다. 속에 어떤 것을 감추고 있는지는 몰랐으나 그것은 왕 천이 알아서도 아니되었고, 알고 싶지 않았다. 왜냐? 늘 이유는 하나였다. '화산파'였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으로 하여금 왕 천은 더욱 예율단리가 신경이 쓰였다. 어떤 것이 부족했던 이는, 반대로 그것을 추구하고 종국에서는 부족했던 것을 아주 많이 쌓아올린다. 애정이 부족하였던 이는 정을 쌓아 주위에 사람을 불렸고, 먹을 것이 없었던 이는 식량을 쌓아 자신의 주위를 음식으로 쌓았다. 그렇다면 예율단리는? 왕 천은 생각을 도중에 끊어냈다. 지나친 참견이요, 지나친 관심이다.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물어볼 것이나, 당장 닥친 것은 이별이기에 자세를 바로 하였다.

 

하필, 하필이면. 왕 천은 화산파의 이들만 나열하여 떠올리다 보니 필연적으로 연파도를 떠올렸다. 노을보다 붉고, 단풍보다 붉은 색을 지닌 연파도를 떠올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화산파에 가지고 있는 편견, 일반화를 모두 가지고 있는 집결체와도 같은 연파도. 왕 천은 연파도를 아주 지독히도 싫어했다. 물론 본인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왕 천 특유의 '예의'와 체면치레 때문이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성정이 악한 이가 아님을 알았으나 '화산파'였기에 왕 천 스스로가 거리를 두려 하였다. 허나 대화를 거듭할수록 거리를 벌리기는 커녕,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경조사까지 손수 찾아와 주겠다 말하는 이를 단호하게 쳐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다만 왕 천은 속으로 꽤 안심했는데, 연파도가 문파 내에서 잘 어울리니 결코 혼자가 될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먼 미래, 어쩌면 가까운 미래일 지 모르나 다시 연파도를 만나더라도 분명 혼자가 아닐 것을 알기에 미련없이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잠시 쉴 겸 도를 놓고 그 자리에 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왕 천은 화르륵 타오르는 화산파의 이들만 떠올리니 절로 갈증이 탔다. 미리 떠온 물은 미지근 하였으나 당장의 갈증은 해소 시켜주었다. 달빛이 물을 비추니 일순간 푸른빛이 보였다. 하여, 다음으로 떠오른 이들은 푸른색이 썩 잘어울리는 점창파의 삼대제자들이었다.

 

청무진은 제법 왕 천이 눈여겨 보고 있는 자 였다. 언행이 가볍지 않고, 실력이 출중하여 시선이 안갈 수가 없었다. 수련 또한 성실하게 임하여, 왕 천이 비무대회에서 꼭 만나고 싶다고 벼르고 있던 표본 그 자체였다. 다만 자신과 청무진이 수련하는 시간이 엇갈려 몇, 보지 못한 것이 흠이 었다. 만약 비무대회가 끝난 이례, 청무진과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필시 대련을 청하고자 하는 것이 왕 천의 바람 이었다.

 

제법 신출귀몰한 그는 있는 듯 없었고, 없는 듯 있었다. 비무대회에서도 좋은 결과를 보였으나 왕 천으로서는 한숨이 나왔다.(봉을 던지는 부분에서 왕 천은 한숨을 푹푹 쉬기도 하였다.) 허나 수련도 꼬박꼬박하고, 말이 가벼우나 거짓을 하지 않았으니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는 이가 바로 현월이었다. 점창파에서 유일하게 의술을 하니, 왕 천으로서도 관심이 갔으나 끝내 현월과는 사소한 대화와 대련밖에 마치지 못했다. 진중하게 얘기를 나누자니 왕 천이 낯을 많이 가린 탓도 있었다.(놀랍게도 왕 천은 낯을 가렸다.) 허나 비무대회 때문에 모여 만난 구파의 삼대제자들 중, 가장 편하게 대한 이가 현월이었다. 허니, 이 이별이 끝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왕 천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왕 천은 한 마리의 짐승 인줄 로만 알았다. 새하얀 털이 몸의 반을 뒤덮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키도 제법 컸기에, 같은 삼대제자 일 거라는 생각도 못하였다. 그가 바로 탐유였다. 처음 무림맹에서 현무진인과 만났을 때도 우연찮게 탐유와 같은 조에 편성이 되었는데, 그 때를 상상하면 왕 천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가벼운 언행, 능글맞은 행동에 얼굴의 반을 가려 눈을 볼 수 없었다. 사람의 진심은 창에 비친다고 한다. 그 창이 눈이요, 눈은 마음의 창이니. 왕 천은 속을 알 수 없는 탐유를 멀리하고자 하였다. 헌데 이게 무슨 일 일까? 비무대회에 참가한 왕 천이 가장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귄 친우가 탐유였다.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탐유를 보고는 하나, 이별이 다가오니 그것마저도 관두었다. 점창파의 속을 알 수 없는 친우. 허나 심성이 나쁘지 않으니, 종종 연락을 넣으려고 마음 먹는 왕 천이다.

 

서책을 추천해주고자 밤새 머리를 썼으나 왕 천은 결국 고르지 못했다. 기행문에 수련이 같이 적힌 것으로 할 지, 편히 이곳 저곳을 누비며 경험한 것을 적은 기행문을 줄 지. 그 고민이 비무대회의 마지막 날 까지 이어졌으니 지각도 이런 지각이 없었다. 황급히 서책을 골라 준다 하더라도, 무림맹의 것이니 하루만에 다읽어야 하였다. 기만도 이런 기만이 없으니 왕 천은 결국 류하에게 책을 권하지 못하였다. 다정하고 신중한 류하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왕 천은 자리에 앉아 퍽 한숨을 내쉬었다. 예의를 모르는 이가 되지 말자 다짐했것만, 정작 자신에게 예를 다한 류하에게 이를 어겨버렸다. 도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자세를 가다 듬었다. 필시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다음에 만날 류하에게는 망설임 없이 서책을 권할 수 있도록, 꼭 그리하자고 다짐하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예사로운 몸짓, 탁월한 감이 뛰어났다. 특히나 식사에 있어서 만큼은 그 진중함이 왕 천을 뛰어 넘으니, 다소 놀랍기도 하였다. 왕 천은 처음 현리비를 보았을 때 느낀 감상은 '사람이 좋아 보인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구나' 였다. 인상이 밝고, 얼굴에 그림자가 없으니 왕 천으로서는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구나- 싶었다. 연배는 자신보다 어렸으나, 현리비는 점창파의 삼대제자 였다. 지독하다 불리는 그 점창파의 수련을 거친 이 답게, 몹시 민첩하였다. 언행이 가벼운 듯 싶어도 가볍지 않아, 왕 천은 조금 독특하게 현리비를 기억했다. 물론, 현무진인에게 다리를 물릴 때 만큼은 그 민첩함도, 감도 소용이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양 다리를 와그작! 물린 왕 천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웃음이 나왔다. 도를 휘둘러 다시 초식을 이어가다 터진 웃음에 그만 자세가 흐트러졌다. 주위에 다른 이가 없으니 억지로 웃음을 참을 이유도, 안웃은 척 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 도를 놓고 왕 천 또한 그 자세 그대로 뒤로 엎어졌다. 신기한 사람, 그러니 다음에 만난 다면 또 대화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어쩌면 지금 왕 천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뛰어난 사람이 되어있을 지 몰랐고,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허나 미래는 모르는 것이요, 모르는 것은 창의로 채우는 것이 인간이었다. 왕 천은 팔을 들어 제 얼굴의 반을 가렸다.

 

소화는 왕 천이 어려워 하는 이들 중에서도 조금 ... 그 이유가 특이하였다. 얼굴이 아름답다니, 반짝인다는 둥의 말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왕 천이 14년동안 그 짧은 생을 살아오며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하나 있다면, 외모에 대한 칭찬이었다. 워낙 가문의 이들이 진중한 탓도 있었고, 하필 들어간 문파 또한 무당파였으니 말이 필요한가. 허니, 처음에는 소화가 제게 욕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얼굴만 곱고, 수련의 경지는 낮은 시골 촌뜨기 호북 무당파!'같은 것으로 말이다. 허나 소화와 대화를 이어갈수록 왕 천은 깨닫고 만 것이다. 소화는 그 어떤 말에도 거짓이 없다는 것을.(왕 천은 놀랍게도 진실한 이를 좋아했다. 비록 언행이 가벼울지라도.) 하여, 겉으로는 틱틱 대고 있었으나 내심 소화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었다. 단순하고 언행이 무겁지 않은 이였으나,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점창파의 소화로 말이다. 자신의 시덥지않은 변덕 또한, 소화는 마찬가지로 거짓없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지극히 소화다운 대답이었기에 왕 천은 제가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오직 왕 천 만이 알았다. 하여, 다음 기회에 소화를 만난다면 스스로가 진실하게 말할 수 있고자 하였다.

 

아미파, 그 자체를 사람으로 빚어둔 이가 아닐까. 왕 천은 스스로가 생각해낸 것 치고는 나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혜초는 말 그대로 아미파의, 아미파다운, 아미파를 꼭 닮은 사람이었다. 언행이 무겁고 정중하며 예의를 잘 알았다. 게으르지 않았고, 냉철한 판단력 까지 갖추었으니 지극히 왕 천이 가까이 하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모아 두었다. 비무대회를 관람하며, 다소 ... 뜻밖의 모습을 조우하였으나 그럼에도 왕 천은 혜초가 신기하였다. 칼 같은 행동, 끊임 없이 배우고자 하는 학구열,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 허니 반대로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비록 이번 비무대회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은 아미파의 홍양, 같은 문파원이었으나 혜초는 그 아피마의 가장 높은 사저였다. 위로의 말을 전한다면 그 또한 예의가 아니었으며, 아미파의 승리를 축하한다 말하기에도 껄끄로웠다. 왕 천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아미파는 탈속세를 지향하고, 남성인 제자를 아주 드물게 받았다. 왕 천이 알기로는 현재 삼대제자 중에 남성은 없었다. 남성이 껄끄러울 것임에도 혜초는 저와의 대화를 제법 잘 받아주었다. 허니, 꼭 작별을 고하고자 하였다. 훗날 혜초와 만난 다면 또 대화를 기약할 수 있도록 말이다.

 

붉은 머리카락은, 연파도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밝게 빛나는 색채가 눈이 부시었으니, 그 빛으로 물들여 이번 비무대회에서 승전보勝戰譜 를 올린이가 홍양이다. 무엇을 생각하는 지 잘 알기 어려웠으나, 왕 천은 홍양이 썩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게 배움을 청하고자 하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다. 비무대회에서도 승리하였으며,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 모습에서 깨닫기도 했다. 무엇을 생각하는 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왕 천 스스로가 홍양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다만 깨달음이 늦어, 비무대회가 끝나는 날이 되었다. 이번 기회는 찰나와 같이 지나갔다. 허나 인간의 사는 종 잡을 수 없다 하였으니, 필시 홍양과는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 천은 누웠던 자세를 세워 정자세로 앉았다. 다음에 홍양을 만나게 된다면 더욱 재밌는 고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였다. 물론 배움을 게을리 하지않는 홍양에게 줄 선물 또한 준비하기로 하였다.

 

손에 든 것이 반짝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고 하니 '대화'라 일렀다. 왕 천은 같은 의료의 길을 걷는 아연에게 관심이 있었다. 정직하고, 거짓이 없는 아연은 왕 천이 싫어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여, 왕 천 으로서는 아연을 만나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왜 잠시 뿐인가 하였더니, 아연의 손에 들린 '대화'가 문제였다. ... 아연이 '대화'를 든 이후로 왕 천은 종종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미파가 꿰뚫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이여도 꿰뚫는다 하였으니, 그 앞에서 웃는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이는 몇 없을 것이다. 왕 천은 허나 아연이 친우이길 원했다. 제가 물어본 것에 성심성의로 답해주는 이를 어찌 친우로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자세로 앉아 주머니를 뒤적이니, 아연에게 받은 실장신구가 나왔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위해 필히 간직 하는 것이 친우 된 도리. 왕 천은 혹여 실이 풀릴까, 실 없는 걱정을 하며 다시 주머니에 그것을 넣었다.

 

 

눈 처럼 하얀 이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서늘한 인상이 아미파의 의복과 썩 잘어울렸다. 하여, 그 이름이 '백운'이라 하니 잘 어울린다는 말을 빼놓을 수 없었다. 또한 구름 운은 이를 운으로도 읽는다. 자신의 한자 또한 이를 천이니, 이상한 구석에서 친밀감을 느끼는 왕 천이다. 백운은 수련에 제법 진중하여, 왕 천 으로서는 말을 붙여보고 싶은 상대였다. 언행이 가볍지 않았고, 늘 자세가 준비되어 있으니 가히 구파의 일원이었다. 다른 이들이 시답잖은 농담을 할 때도 백운 만큼은 그러지 않았기에, 또 시선이 가기도 하였다. 허나 수련에 임하는 시간이 엇갈려 자주 보지 못한 것이 왕 천으로서는 뼈 아픈 실책이었다. 하니, 이번 이별에 왕 천은 미련을 두지 않았다. 무림인은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훗날 다시 만날 날, 대화보다는 대련에 임할 수 있도록 늘 만반의 준비를 하자. 왕 천은 그리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도를 이용한 수련은 여기까지 인 듯 하였다.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 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니, 더 이상 도를 사용 하였다가는 필시 화를 입을 듯 했다. 권각법의 수련을 위해 도를 제자리에 두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호흡을 고루 내쉬고 배움 그대로 자세를 옮겼다. 천천히, 그리고 급하지 않게 자세를 가다듬으니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 나가던 아미파의 자효였다. 허나 비무대회에서 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 천의 사형인 건 휘와 함께 열과 성을 다한 함성을 지르며 시합을 치룬 자효. 허나 그 진심과 그 열정을 알기에 왕 천으로서는 썩 기분이 좋았다. 진심을 다하고, 예를 아는 이를 어찌 왕 천이 싫어할까. 거기에 완두황을 나누어주기도 하였으니 자효에게는 빚이 있었다. 만남은 짧았으나, 불교의 가르침 대로라면 필시 이번 이별 이후에도 만남이 있을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왕 천은 내심 자효와 또 만나게 될 훗날을 떠올렸다. 빚이 있으니, 그것을 갚아야 하기도 했고 자효가 얼마나 더 수련의 경지를 쌓아올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쉰다. 호흡은 가장 기초적인 것이기에, 물 흐르듯 이어나가며 자세를 고쳐나간다.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지르고, 지면을 밟자마자 다음 자세를 이어간다. 물 하니, 점창파 이외에도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고요하게 담긴 물 처럼 잔잔한 낭리가 그러하였다. 다소 왕 천을 어려워 하였으나 대화에 거짓이 없었다. 아미파 답게 진실하게 대화에 임하는 그 태도에, 왕 천은 더욱 깍뜻이 낭리를 대하였다. 그것이 왕 천 나름대로의 호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무당산에서는 모두가 그러하였기에, 늘 본보기가 되었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여다. 역으로 낭리를 부담스럽게 해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왕 천이 제법 낭리와의 대화를 마치고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하니, 왕 천으로서는 두고두고 제 언변과 융통성 없음에 탄식하였다. 필시 이것이 마지막이 되어서는 아니되었다. 꼭 다음 만남이 있어야 했다. 그때는 필시 융통성을 기르고, 언변을 조금 더 부드럽게 고쳐 다가 가고자 하였다.

 

단향. 왕 천은 생각할 수록 몸이 무더졌다. 물 흐르듯 자세를 고쳐 권각법을 이어 나가다 멈추었다. 단향에게 만큼은 정말 꼼짝없이 속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제법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처음에는 배움과 수련의 경지가 깊고, 구파의 일원으로서 마음가짐이 제대로 된 인물이라 생각하였다. 허나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이를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왕 천은 마른 세수를 했다. 예의 '질문'일에서 긴가민가 하였으나 비무대회가 끝나고 나서야 확신하였다. 그러니 필시 다음에 만난다면 어떻게든 이것을 돌려줄 것이라, 왕 천은 탈속세에 맞지 않는 복수의 칼날을 도록도록 갈았다. 물론 아직 이별하지 않은 지금의 왕 천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단향을 보았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기에 다소 사심(...)이 담긴 미소도 나왔다.(물론 왕 천은 자신이 미소를 지은 줄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자들은 당연 호북 무당산의, 무당파 사형과 사제들이었다. 그 중 배움이 가장 긴 리 사형은 당연 으뜸으로 떠올랐다. 행실이 타의 모범이 되며, 늘 확고한 행실과 예의바른 언행은 왕 천에게 있어 완벽한 이상향 그 자체였다. 비록 비무대회에서 아쉬운 결과를 얻었으나, 그것이 중요한가. 제 사존께서 경험을 쌓아오라 하였으니, 리 사형 또한 이번 비무대회를 통하여 많은 경험을 쌓으셨을 거라 내심 생각하고 있다. 다른 문파의 삼대제자와 달리, 함께 무당산으로 돌아가 다시 무당파의 가르침을 배울 사형이기에 왕 천은 썩 무거운 감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도 꾸준히 사형과 함께 성장할 수 있길 바랄 뿐 이었다.

 

소 사형은 제법 왕 천에게 .. 여러모로 아슬아슬한 사람이었다. 언행이 가벼운 듯 싶다가도 수련을 임하는 태도가 진중하니 알다가도 모를 이가 소 사형이었다. 거기다 두뇌의 회전이 빨라, 상황 판단을 잘하였다. 이번 비무대회에서는 아쉬운 결과였으나, 왕 천은 제 사형의 한계가 여기까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필시 다음에는 더 강해지실 것이며, 되도록이면 가벼운 언행도 무거워 질 것이라 생각했다.(물론 이것은 왕 천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망에 가까웠다.) 

 

이쯤되니 왕 천은 거의 수련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자세가 되었다. 마지막 날이니 풀어지는 것인가 싶다가도 자세를 바로하였다. 마지막 날이니 만큼 더욱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여야 한다. 왕 천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자세를 고쳤다.

 

이번 비무대회에서 가장 아쉬웠던 이가 영 사형이었다. 평소 알게 모르게 영 사형에게 거리를 두고 있던 왕 천이었으나, 결승전에서 만큼은 한 마음으로 아쉬워하였다. 같은 문파의 삼대제자이기도 했고 비무대회의 열기에 취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언제 날을 세웠다는 듯이 응원을 하였고, 왕 천으로서는 나름 체면까지 구겨가며 '태왕 어르신 사 ... 합니다.'까지 말했다. 겉으로는 빛 좋은 사형, 사제 지간이었으나 이후에는 그저 빛이 좋은 이가 아닌 그저 벽을 세우지 않는 아주 평범한 사형, 사제 기간이 될 수 있을 지... 왕 천은 내심 궁금해 하였다. 영 사형과 제 일 이었지만, 그것은 어쩐 지 먼 미래에나 이루어질 것 같아서였다.

 

자세를 고쳐 다시 주먹을 뻗고, 몸을 놀렸다. 마음을 엄격하게 먹으니, 떠오르는 이가 류 사형이었다. 평소 부드러운 인상의 사형이었으나, 스스로에게는 늘 엄한 류 사형. 예의가 바르고 행실이 무거우니, 왕 천으로서는 호감이 높은 사형이다. 늘 한 쪽 눈을 가리고 있기에, 내심 이번 비무대회에서 봉인 된 눈 (...)의 비밀이 풀리나하고 기대하던 왕 천이었다. 아쉽게도 기회가 날아갔기에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자세를 고쳐가며 숨을 뱉는다. 재빠르게 발을 지면에 붙혔다가 떼고 다리를 올린다. 생각한 것 만큼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자신에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숨을 내쉬고 잠시 쉬고 있으니 한 인물이 떠올랐다. 왕 천의 바로 위에 있는 사형, 건 사형이다. 연배는 같았고, 키는 자신보다 한참 작았지만(어쩐 지 강조하여 생각하는 왕 천이다.) 무당파 특유의 방어가 탄탄한 사형이 바로 건 사형이었다. 겁이 많은 것이 다소 흠이었으나, 자주 다쳐오는 것을 보면 생각을 고쳐 먹게 되는 것이다. 다친다는 것은, 반대로 다칠 것을 감수한다는 말. 하여, 무당파에서 종종 치료를 해주면서도 왕 천은 건 사형에게 미운 정이 조금 있었다. 조금 더 자신을 믿는 다면, 필시 앞으로 나아갈 것인데. 허나 이런 생각을 밖으로 내보일 왕 천이 아니다. 예의가 아니기도 하였고, 앞으로 정진해야 하는 몫은 오로지 건 사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리 생각나는 이들이 떠오르니, 이 자를 떠올리지 않는 다면 ... 조금 섭섭하지 않을까. 왕 천은 작게 웃었다. 절대 백 사제의 앞에서 보여주지 않을 미소였다. 생긴 것이 순하고 화를 낼 줄 모르니, 왕 천으로서는 내심 한 숨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사제 였기에 싫지 않았다. 또한 수련에 늘 진중하게 임하니, 왕 천 또한 자신에게 엄격해 졌다. 스스로를 보고 백 사제 또한 훌륭히 수련의 경지를 쌓아, 한 명의 무당인이 되기를 바라며. 허나 최근 들어 속세의 내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 또 한숨이 늘고 마는 것이다.(자신의 생각은 지나치는 왕 천이다. 누가 더 속세에 물 들었는 지도 모르고.)

 

하여, 모두를 떠올리니 시간이 제법 지나갔다. 왕 천은 깔끔하게 마무리 동작을 내지르고 수련장을 정리하였다. 마지막 수련이었기에 미련은 있었으나, 몸은 개운하였다. 이번 만남으로 얻은 것이 적잖게 많았다. 그러니 필시 다시 만날 것이니.

 

會者定離 去者必返이다.

 

 

공포 11672 자

 

 

 

 

 

 

 

 

 

 

見物生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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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物生心

豕心

 

 

 

여태 그려왔던 세계는 몹시나 작았다. 사존의 그림자에 서 서 모든 것을 보았기에, 유채색이라 부를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왕 천에게 색이 있는 유일한 자는 사존 '샤오 웨이' 뿐이었다. 독초를 삼키기 이전에는 물론,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그저 흘러가는 물도, 계절에 맞추어 떨어지는 꽃잎도 반짝여 보였다. 만물이 아름다웠고, 빛이 났다. 그래서 였을까. 왕 천은 8세의 그 날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더이상 계절의 바뀜에 감탄하지 않았으며, 흘러가는 물이 가증스럽다는 생각 마저 하였다.

 

사고가 어긋남에도 정도가 있으나, 왕 천은 증오하고 미워하며 시샘하는 것이 지나쳤다. 운이 좋아 목숨을 건졌으나 잃은 것이 많았다. 살아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잡아준 사존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웠고 반짝여 보였다. 그 손을 잡았을 때 착각하고 말았다. '아 나의 세계는 또 이렇게 아름답구나.' 허나 그것은 왕 천의 한낱 꿈도 되지 못하였다.

 

사존의 다채로운 색이 담긴 그림자에서 세상을 보게 된 것이지, 왕 천의 세계가 넓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상태로 14세가 된 왕 천은 여전했다. 달라질 수 없었다. 모든 행보와 사고가 발전이 없었으나 본인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오직 왕 천의 사존만이 알고 있었다. 하여, 왕 천을 비무대회로 보내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오게 하였다. 다행히 왕 천 또한 비무대회에 참가 하고자 하였으니 순조로웠다.

 

샤오 웨이의 바람과 달리 왕 천은 스스로 눈을 감았다.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것으로 부터 눈을 돌렸다. 사존이 없는 세계는 가치가 없었다. 구태어 알 필요도 없었고 그렇게 해야할 이유가 왕 천에게는 없었다. 사존의 말을 따라 여러 경험을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무대회 라는 틀 안 이었다. 일생의 딱 한 번뿐인 경험(왕 천은 이후 사건이 어떻게 되더라도 비무대회에는 딱 한 번만 참여하고자 했다.)이었다. 그랬기에 다소 무리를 하며 꾸역꾸역 경험들을 쌓았다. 왜? 어차피 호북으로 돌아가며 다 버릴 수 있었으니까. 허나 ... 버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 너 그래서 탈속세 했냐? "

바로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었다. 여태 풍족한 유년기를 보내 왔으며, 호북 무당산에 오른 뒤에도 넉넉하게  지낸 왕 천이다. 부족함이 없었기에 필요로 하는 것이 없었고 제 물건이라 부를 것도 적었다. 왕 가문을 나오며 가져온 것이라고는 귀걸이 한 쌍이 다였다. 때문에 비무대회를 위해 중경에 모인 이래, 물건에 대한 소유욕을 처음으로 느꼈다.

 

수련을 틈틈이 하면서도 왕 천은 물건을 틈틈이 모았다. 제일 처음 기묘한 피리를 얻고난 뒤에는 한참동안 피리를 불어볼 생각도 않하고 하염없이 보기만 했다. 처음으로 노력하여 그 수당을 받았고, 원하는 물건을 샀다. 단순하기 그지 없는 일이 었으나 왕 천은 그것이 신기했다. 무채색의 세계에서 반짝이는 것을 찾은 것 같았다. 한 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이후는 쉽다. 왕 천은 돈이 생기는 대로 현무진인을 찾아갔다. 원하는 것들을 사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고, 경험이라는 구실을 앞세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켰다.

 

그 중 가장 가관인 것은 현무진인의 '홀짝'이었다. 왕 천은 내기라고 불릴 만한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여 처음에는 호기심이었고, 이래에는 '집착'이 되었다. 돈이 생기는 즉시 현무진인을 찾아가 홀짝에 도전하였다. 속세의 것은 재미가 있다. 그것이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속세에는 인생의 축소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작게는 희노애락, 크게는 교훈이 담겨 있으니 '홀짝' 또한 그짝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 人生事 塞翁之 , 덧없는 호접몽胡蝶夢 , 그야말로 여옹침呂翁枕 , 간사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하는 칠금七擒 이니 그 작은 내기에도 배울 것이 많았다. 하여, 왕 천은 홀짝에 빠졌다. 아주 심취했다. 그 누가 왕 천은 호북 무당파의 삼대 제자로 보았을까.(돈이 생기는 족족 현무진인을 찾아가니, 위신을 입에 담으면서 가장 많은 체면을 구겼다.)

 

결론적으로 왕 천은 쫄딱 망했다. 아주 쫄딱. 벌어들인 돈이 꽤 많았으나, 높이 올라가는 만큼 추락하는 높이가 깊다. 황량몽黃粱夢 이니 왕 천은 그제서야 스스로의 행동이 꼴불견임을 인지 하였다.(물론 깨달음이 늦어 0냥이 되었다.) 사존께서 아셨더라면 필시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리느라 호북 무당산의 모든 새가 날아갈 것이다. 무당산에 남은 다른 삼대제자들은 '왕 천이 그랬을리가?', '왕 천이? 잘못 본 거 아냐?'라는 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중요한 사실은 왕 천이 그리 쫄딱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털지 못한 것에 있다.

 

비무대회가 끝나고 짐을 정리하여 중경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당도했다. 왕 천은 비무대회에 참가한 댓가로 3냥을 받았다. 그가 어디로 향했는고 하니, 바로 현무진인의 앞이었다. 그동안 중경에 와 모은 전재산(그래보았자 4냥이었다.)을 걸었으나 이 또한 쫄딱 망했다. 왕 천은 내기에도 집착하였으나, 물건에는 더욱 집착하였다. 돈은 재량만 있으면 얼마든지 벌 수 있다. 허나 물건은 돈이 있어야 구할 수 있다. 하여, 왕 천은 끝까지 내기에 도전하였고 결국 백냥이 넘는 돈을 챙겨 호북으로 오게 되었다.

 

물건에 집착하게 된 왕 천을 알아본 이는 적었다. 함께 중경으로 향했던 삼대 제자 몇이 다였다. 허나 사존, 샤오 웨이는 왕 천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아니 갈 때는 가벼웠던 제자가 어찌 이리 무거운 속세를 짊어지고 왔는지', 말 그대로 왕 천의 주머니가 너무 무거웠다. 무당산에 도착한 이후, 샤오 웨이는 잘 다녀왔는 지 물었고 이후 왕 천을 데리고 산을 올랐다. 밤이 늦었으니, 어두운 산길은 그야말로 위험천만 했다.

 

달이 떴으나, 나뭇잎이 우거지니 빛이 닿지 않았다. 칠흑같은 어둠 속을 샤오 웨이가 앞장 섰다. 이 위험한 야산을 올라 어디로 가는 가 하니, 폭포수가 시원하게 떨어지는 절경 이었다. 샤오 웨이는 왕 천에게 146냥이 든 주머니를 달라고 했다. 왕 천은 눈치가 제법 느린 편인데, 이 때 만큼은 이시목청耳視目聽 처럼 주머니를 품 깊숙이 넣었다. 

 

샤오 웨이는 그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 하였다. 처음 왕 천의 손을 잡은 이후, 제자가 무엇을 욕심낸 적이 있던가. 비무대회에 참가하겠다 의사를 밝혔을 때도 놀랐지만, 지금만 못하니라. 폭포수 아래에서 실컷 웃음을 터뜨린 샤오 웨이를, 왕 천은 조금 두려운 눈으로 보았다. 사존을 존경하고 있기에, 말씀을 어기는 것이 큰 실례임을 알고 있다. 허나 사존에게 차마 주머니를 줄 수 없었다. 무당파는 본래 속세를 멀리하고자 가르치나, 왕 천은 처음으로 쥔 속세를 놓지 못했다. 샤오 웨이는 왕 천을 꾸짖지 않았다. 되려 잘되었다며 그대로 산을 내려가자 말하고 왕 천의 어깨를 토닥였다. ' 네가 만약 정말로 주머니를 주었다면, 나는 그것을 몽땅 폭포수에 버릴 생각이었다. ' 왕 천이 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니, 사존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길을 짚으며 나아갔다.

 

속세에 물드는 것이 때론 필요하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속세를 알아야, 왜 탈속세를 지향하게 되는지 또한 알게된다. 또한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자는 되려 위험하다. 목적이 없고, 방향이 없기에 더 이상 나아갈 목표를 세우지 못한다.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나, 적당한 욕심은 삶의 지표를 세워주기도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니 무엇이든 적당해야 한다. 샤오 웨이는 그 집착과 욕심에 삼켜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만을 전했다. 산을 내려와 사존과 헤어진 왕 천은 한참을 서 있었다.

 

바라는 것, 원하는 것, 탐내는 것. 줄곧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 생각한 것들. 무당파의 위신과 명성에 흠을 내면서 까지 손에 넣으려 한 것이 무엇인가. 왕 천은 그제서야 사존의 뜻을 이해하고 수련장으로 향했다. 자신이 가지고자 했던 것은 돈도, 물건도 아니었다. '목적'이었다. 사존의 손을 잡아 무당파에 입문하였으나, 왕 천에게는 목적이 없었다. 당장 눈 앞의 작은 목적들은 있었으나, 인생의 흐름을 결정 지을 정도로 큰 목적이 없었다. 사존의 그림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왕 천은 아기새처럼 사존이 주는 것들 만을 받았다. 사존이 하라는 것만 따랐다. 하여, 사존과의 대화를 계기로 왕 천은 목적을 가지고자 노력하였다. 이미 사들인 물건은 자신의 방에 두었다. 선물받은 노리개는 직접 착용하였고, 돈은 여전히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당장 손에 쥔 속세는 버리지 않았다. 이것을 토대로 정진하고자 하였다.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 왕 천은 그렇게 비무대회가 끝난 이후 한 동안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사존 샤오 웨이의 바람과 달리 왕 천은 다른 방향을 걸었다. 허나 이 무렵에는 이를 아는 이가 없었다. 

 

공포 4238 자

 

 

 

 

 

 

 

 

 

千思萬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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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思萬慮

효진의 하루는 다를 것 없었다. 좋은 말로는 한결 같았으나, 다른 말로는 늘 똑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성격도 여전했다. 비무대회가 끝난 이래, 효진의 사존 샤오웨이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욕심을 알아 왔으니 효진이 더 솔직해지고 감정을 드러냄에 있어 거부감이 덜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허나 그것은 부질없는 기대 였다. 온화하고 상냥한, 그저 미소를 지을 때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이로 자랐으면 하는 사존의 바람은 철저히 빗겨나갔다. 냉철함은 여전하였고, 최저한의 예의만 지켜서 상대를 무시하는 것도 그대로 였다. 다만, 내면의 성장이 더디긴 하였으나 의료에서 만큼은 그 성과가 일취월장 하였다. 관례를 보낼 무렵의 효진은 한 사람의 의료인으로서 그 몫을 다하였다.

" 네가 받은 자의 무게를 안다. 그러니 더 멋대로 살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구나. 그저 사람 된 도리만 지키렴 아천. "

사존 샤오웨이는 그리 말하며 효진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였다. 며칠 뒤, 효진이 무당산을 떠나 출사할 것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공격에 일가견이 없는 효진이었으나, 무당의 가르침을 받아 흐름에 있어서 만큼은 조화로웠다. 의료에서도 빛을 발하니,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을 터였다. 문파의 이들도 '효진이라면 무예가 뛰어 나지 않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세상에 도움을 주겠지'라며 입을 모았다. 그러나 정작 효진은 스스로의 출사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에 대해 큰 보람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고, 혼란한 속세에 자신이 무슨 도움이 될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허나 이미 정해진 것이기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제일 큰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사존'께서 원하고 기대하셨기 때문이었다. 

효진은 짐을 정리하는 것에 별다른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모든 채비를 마쳤다. 애시당초 챙길 만한 것이 없었다. 귀걸이 한짝과 약간의 물건이 효진이 가진 전부 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존께 인사를 드린 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떠나고자 하였다. 효진은 언제나와 같이 사존이 계실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사존, 접니다. 제자 효진입니다. "

이리 말하지 않더라도 사존은 효진이 온 것을 단박에 안다. 효진 특유의 무게가 실리지 않은 가벼운 발걸음과 딱 맞춰 떨어지는 호흡을 샤오웨이가 읽어내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지척에서 사존이 먼저 문을 열었을 터. 헌데 어째서 인지 한참이 지나도 기척이 없었다.

" 사존...? 실례를 무릅쓰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효진은 문을 열자마자 제 짐을 내팽겨 치고 방으로 뛰어 들었다. 조용히 쓰러져 옅은 숨만 내쉬는 사존은 효진의 걸음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후, 밝혀진 것은 사존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 이었다. 그 누구도 고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불치병, 나라의 왕 마저도 엄격히 관리를 할 뿐 손을 쓰지 못한 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효진은 자괴감과 괴로움에 한동안 사존을 찾지 못했다. 약속 되었던 출사는 취소하였다. 무당산에 남아, 사존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을 준비를 하였다. 약초를 캐고, 모든 서적을 읽었다. 이미 기존에도 지나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리를 하던 효진이었다. 결국 사존이 효진을 먼저 불러 들였다.

"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이리 될 것을 알고 있었어. "

"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제가 더 신중 하였더라면 이리 상황이 악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존 ... 죄송합니다. 못난 제자가 자만에 빠져 우둔해져 있었습니다. "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은 사존이었다. 허나, 효진의 수심이 깊어 사존은 입을 열지 못하였다. 웃길 바라고,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데려온 아이였다. 샤오 웨이는 쓰게 웃으며 효진의 손을 다잡았다. 밀쳐 내기에는, 효진이 너무나 심약했다. 겉으로는 바짝 가시를 세워 다가오는 이를 찌르기 바빴다. 샤오 웨이는 그 모습이 마치 '고슴도치' 같다 생각하였다. 모든 것이 두려워, 가시를 세우고 경계를 허물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다가오는 이가 있다면 매섭게 돋아난 가시로 찔러, 도망가게 만들거나 질리게 해버렸다. 하여, 효진의 곁에 남은 이들은 매우 소수 였다. 만약 자신마저 이 아이의 손을 놓는다면 누가 효진의 마음을 헤아릴까. 그 생각에 그저 효진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고자 하였다. 방향은 달랐으나, 효진이 이를 진정 원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 샤오 웨이는 효진을 물렸다. 관례를 지내고 자를 받았으나 아직 어렸다. 조금 더 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욕심을 한탄하듯 내쉬었다.

" 내가 일러주지 않아도, 어차피 영민하니 ... 자연스레 알겠지만 두렵구나. 바람에 쓸려, 꺾이지 않길. "

초가 꺼진 방은 금새 그 온기를 잃었다. 칠흑 같은 방에는 한숨만이 가득하였다.

 

**

 

효진은 그 뒤 쭉 호북에서만 지냈다. 출사 하지 않은 채, 무당파에 남아 모든 것을 지켰다. 사존의 병을 연구하며 틈틈이 수련도 병행 하였다. 모든 것에 완벽하고자 하였고, 몸이 아픈 사존의 체면을 지키고자 하였다. 혹여, 뒷말이 나올까 싶어 늘 가식으로 점철 된 가면을 썼다. 무엇이건 덤덤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루는 건 사형을 불러 함께 산을 내려 가기도 하였다. 무당산에서 구할 수 없는 약재는 속세에서 구해야 했다. 효진은 어릴 적 삼킨 독초의 영향으로 인해 공격 하는 능력을 잃었다. 꿰뚫고자 하는 예리함도 함께 잃었기에 사존은 효진에게 흐름을 잘 따라갈 수 있도록 권각법의 초식 중에서도 빠르고 민첩한 것들을 가르쳤다. 허나 그 한계는 명확했다. 독사는 잡아도, 호랑이나 맹수를 상대할 때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확실한 한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평소 건 사형을 치료해주며 빚을 달아 두었다. 하산 할 때는 이를 핑계로 건 사형을 부리기도 했다.(물론 건 사형 성격에 효진과 티격태격한 시간이 더 많았다.)

" 비실비실해서 내가 없으면 산도 못내려 가냐? "

" ...지금 시비 거시는 겁니까. 어차피 제게 지신 빚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혹, 겁이라도 나십니까 사형. "

건 사형이 말을 붙이면 효진은 날카롭게 받아쳤다. 둘은 무당파의 수화불용 이었기에, 마음 맞는 경우가 드물었다. (과연 둘이 마음이 맞는 날이 있긴 한가.)

" 너는 또 또.... 에휴 됐다. 말을 말아야지. 너랑 입씨름 할 시간에 내려가는 게 빠르겠다. "

"배움이 빠르신 듯 하여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정진하시길 권합니다 사형."

서로 틱틱 거리기는 하나, 서로가 감안하고 봐주는 관계. 하여 미운 정이 들었다. 효진은 제법 건 사형에게 쏘아 붙이듯 말하면서도 그를 아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기엔, 덤덤한 채 한 세월이 길었다. 건 사형의 성격상 ' 네가, 나를? 아낀다고? 왕 씨면서 거짓말 하면 벌 안받냐? ' 같은 소리를 들을까 함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

 

어느 날은 붉은 머리카락의 소문에 끌려, 홍양을 만나러 가기도 하였다.  우연히 재회 하였기에, 지난 날의 약속을 지키고자 대련을 청하였다. 첫 비무대회에서 승리한 사람이 누구인가. 또한 아미파의 사람이 꿰뚫고자 하는 것은 필시 꿰뚫을 지니. 효진과 홍양의 대련은 그 결과가 불 보듯 뻔했다. 하여, 효진이 제법 크게 당하여 며칠 앓아 눕기도 했다. 하지만 다친 것은 대련으로 인한 것이지, 마음 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종종 홍양과 만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 저곳, 발 닿는 곳으로 떠나는 홍양을 보며 효진은 내심 부러워 하였다.

' 만약 나도 출사를 하였더라면, 필시 홍양 처럼 넓은 곳을 누볐겠지. '

허나 생각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효진 스스로가 선택한 현재였으며, 사존의 곁에는 제가 필요했다. 하여 효진은 홍양과의 재회가 기대되는 한 편, 두려웠다. 홍양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소한 것 마저도 재미가 있었고, 흥미가 있었으므로.

" 또 이리 헤어진다면, 언제 만나게 될 지 모르겠군요 홍양. 다음에 호북에 들리실 때는 모쪼록 무당산으로 서신이라도 한 통 날려주십시오. "

홍양을 만나면, 열에 아홉은 몸 성한 곳이 없었다. 자잘하게 다치거나, 어떤 때에는 제법 손을 보아야 하는 상처까지 달고 나타나니 효진의 표정이 풀릴 날이 드물었다. 미리 찰과상이나 지혈에 좋은 약초를 캐두어도, 언제 홍양이 호북에 들릴 지 몰랐기에 작별을 고할 때 마다 잔소리 처럼 내 뱉는 말이 저것 이었다.

 

**

 

효진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친우가 누구냐 묻는 다면, 당연 그가 첫 번째 일 것이다. 탐유,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친우. 관례 이후, 출사를 한 탐유는 꽤나 여러곳을 방랑하였다. 호북에 까지 들리니, 효진이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호북을 떠나지 않는 효진이다. 탐유가 제 근처에 왔을 때 얼른 안부를 묻지 않는다면, 필시 또 오랜 시간을 기약해야 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하여, 탐유가 호북에 당도하면 효진은 사존께 양해를 구하고 사흘의 말미를 잡아 속세로 내려갔다.

비무대회 이후에도 꾸준히 서신을 주고 받았으나, 얼굴을 만나는 것만 하지 못했다. 식사는 제때 하는 지, 다친 곳 없이 건강하게 지내는 지. 꼭 얼굴을 보고 상태를 확인해야 마음이 풀렸다. 탐유 또한 효진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하였으나(물론 효진이 이를 들을 리 만무하였다. 나중 가서는 적응이 되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능력까지 얻었다.) 효진은 그것이 썩 나쁘지 않았다. 탐유는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바람이 어떠하던가. 부는 방향대로 흘러가고, 손에 쥐려 하면 형체도 없이 흩어져 사라진다. 같은 곳에 머물지 않고, 늘 새로이 불어 닥친다. 지금 만나는 탐유가, 이후 만나게 될 탐유가 같을까. 얼굴을 마주하고 안부를 물어도, 효진은 가슴 한 켠의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허나 마냥 잡고 있을 수 없기에, 또 다음에 만나자는 약조만 하였다. 자신은 어차피 호북 무당산에 매여 있으니, 어찌보면 약조가 아닌 부탁이기도 했다.

 

" 꼭 다음에도 오십시오. 오셔서 살아있다는 증거를 제게 보여주시고 가십시오 탐유. "

 

**

 

효진의 지난 7년은 친우들과 만나고, 또 다음을 기약하였다. 떠날 수 없으니, 와달라 부탁하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사존의 병은 마치 작시금비昨是今非  같았다.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하면, 단기적인 것이었다. 사존의 병세는 당장 위독한 정도는 아니었다. 허나 효진이 만드는 약재가 없다면 위험했다. 잘못 쓰러진다면 다신 일어날 수 없었다.

" ... 내가 네 발목을 옥죄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는 구나 아천. "

" 아닙니다 사존. 제자 된 도리로서, 어찌 이것을 일이라 생각합니까."

효진이 사존의 손을 포개어잡았다. 미약한 온기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좋았다. 자신이 아플 때도 기꺼이 손을 내밀어준 이다. 어찌 이 손을 놓을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느껴지는 속세에 대한 호기심은 사소한 것이다. 풍수지탄風樹之嘆 이 될 바에는 사존의 곁에 남아 도리를 다하는 것이 나았다. 효진은 스스로에게 그리 되뇌이고 새겼다.

" 허나, 세상의 모든 것이 도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천. 너는 ... 아직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해.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나의 그늘이 아니다. 그러니 세상이 널 부른다 생각되면 기꺼이 응하도록 하렴. "

사존의 말에 효진이 끝내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세상의 부름이 제게 무슨 소용인가. 자신이 아파, 병상에서 사경을 헤맬 때 도움을 준 적이 있었던가. 지금은 사존의 그늘에 있으나, 더 성장하여 제 그늘속에 사존을 쉬도록 눕히면 안되는 것인가. 효진이 혼란한 생각을 접어두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그 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부족한 약초를 구하기 위해 효진이 하산을 했다. 건 사형은 토벌대에 참가하여 시간이 맞지 않았기에, 이번 만큼은 효진이 홀로 길을 나섰다. 무당파의 옷을 벗어두고, 단 한 벌 뿐인 의복을 꺼내 갖추어 입었다. 무당파는 한 때 구파로 이름을 날렸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혼란한 속세에 떠다니는 입담을 더해줄 필요가 없었기에 효진이 단정한 차림으로 산을 내려갔다.

산 고비를 몇 개 건넜을 무렵이었다. 상단 무리로 보이는 이들이 산 중턱에서 꼼짝을 않고 서 있었다. 힐끔, 시선만 주고 지나치려고 하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낙석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듯 하였다. 경려천모輕慮淺謀 한 일부 나무꾼들이 모조리 나무를 베어간 탓에, 약해진 지면이 부숴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허나 의료인이라 불리는 자신이 마냥 지나치기에는, 도리에 어긋나 보였다. 하여, 길을 바삐 떠나야 했음에도 멈춰섰다. 입을 열어 자신이 의료에 일가견이 있다 말하였다.

" 의원님 저도 다쳤습니다! "

" 아이고 의원님, 저는 뼈가 부러진 듯 합니다 저를 먼저 봐주십시오! "

삽시간에 사람들이 효진의 주위로 빼곡히 모여들었다. 산길이라 비탈지고 경사졌음에도, 다쳤다 말하는 이들은 몸을 이끌었다. 효진이 앉은 자리에서 차례대로 다친 이들을 살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었음에도, 발소리가 나지 않는 제 걸음이 들킬까 싶어 천사만려千思萬慮  하였기 때문이다. 다친 이들은 그런 사소한 것에 관심이 없는 모양인지 서두르기만 했다.

팔려고 가져온 약초는 모두 동이 났고, 침은 기분 탓인지 날이 무뎌졌다. 허나 상단의 다친 이들은 한 명도 빠짐 없이 전원 치료를 받았다. 뼈가 부러져 불구가 될 거라며 덜덜 떨던 이도, 머리를 부딪혀 다신 깨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 된 이도 효진이 치료해냈다. 사존의 병에 비하면, 모든 것이 수월했다. 오직 단 하나, 사존의 병 만이 효진의 근심이었기에 이를 떠올리니 호사난량胡思亂量 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상단의 이들은 효진에게 이름을 물었다. 허나 효진은 무당파의 의복마저 환복 하였다. 여무소부도慮無所不到 이니 말할 리 만무했다. 이와 같은 일이 달에 서너번은 반복이 되었다. 사람들이 반은 희고 반은 칠흑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효진을 특정해냈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무표정, 무정히 치료만 하는 그에게 '생사여탈'이라 이름 붙혀 칭했다. 왜 인고 하니, 그 이유가 좋지만은 않더라.

" 어째서 나는 봐주지 않는겁니까 의원! "

" ... 세간의 소문에 귀가 익숙치 않습니다만, 그래도 들리는 것은 알고 보이는 것은 봅니다. 아녀자를 죽이고 금품을 갈취한 이가 이전에 도망을 쳤다 들었습니다. 헌데 어찌 그 생김새가 공자와 닮은 듯 합니다. 혹 성명이 어찌 되십니까. "

" ...이익! 살려달라면 살려줄 것이지 말이 많소! 내가 그랬으면 어쨌단 말입니까! 당장 의료인이라면 죽을 사람을 치료해야 할 것 아닙니까! "

효진이 화를 내는 경우가 상당히 드물었다. 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는 것은 기본이요, 타인에게 제 감정을 오로지 드러내는 것은 '약함'의 반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 날의 효진은 기꺼이 치료를 위해 움직였던 손을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사람을 죽였는데 이는 오직 효진의 분노와 노기 때문 이었다. 주위에 있던 이들이 경악하여 숨을 들이켰다. 오직 효진만이 덤덤한 표정으로 시체를 낭떠러지 너머로 던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모두가 입을 모아 '던졌다' 라고 하였다.) 이 날을 기점으로, 왕 천은 호전적인 성격이 되었다.

"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자는 살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다른 이를 해 하고, 반성의 기미가 없는 이라면 두 말 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의가 있으시다면 제게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

효진이 굳은 표정으로 남아 있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이 중에는 필시 선하고 착한 이들도 있었고, 죽어 마땅한 이들 또한 있었다.

" 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십시오. 저의 행위는 모두 이타利他 가 아닌 이기利己 입니다. "

... 하여, 붙은 것이 생사여탈이니 과연 좋은 뜻으로만 불리지 않았다. 생生과 사死를 손에 쥐고, 인간의 가치를 재어보는 자. 효진을 염라와 같이 대하니, 은밀한 뜻으로는 '신을 기만하니, 필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 있었다. 효진이 눈치가 느렸으나, 이번 만큼은 그 속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을 살려준 이들에게 제대로 된 감사의 말을 듣는 것 또한 드물었다. 허나 괘념치 않았다. 효진이 사람을 살리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 사존께서 하라 하셨으니까. ' 사람을 살리는 것에 있어 보람도, 기쁨도,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저 사존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길 원하였기에 살렸다. 그것이 전부였고, 다른 이유는 전혀 존재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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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진은 비무대회로 부터 7년을 줄곧 이렇게 지내왔다. 사람을 살리고, 사존의 약을 구하며 속내를 숨겼다. 줄곧 이 삶이, 이 굴레가 이어질 것이라 체념하였다. 허나, 문파의 부름과 세상이 부르니 사존이 제게 부탁한

" 허나, 세상의 모든 것이 도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천. 너는 ... 아직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해.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나의 그늘이 아니다. 그러니 세상이 널 부른다 생각되면 기꺼이 응하도록 하렴. "

말이 떠올라 정백대전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제가 참가하여, 사존이 정백대전에 오지 못하게 막고 싶었다.

" 사존, 한 가지만 약조해 주십시오. 제가 정백대전에 참여할 터이니, 사존께서는 부디 호북에 남아 무당산을 지켜주십시오. 제자의 ... 마지막 부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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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투톤 인 이유 / 공격과 관통이 0에 수렴하는 이유 

 

 

 

 

 

 

 

茫茫大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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茫茫大海

念願

 

 

 

 

그동안 말로만 전해 들었던 그곳은 아주 긴 시간동안 왕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푸른 빛이 끝 없이 펼쳐진 지평선. 호수보다 깊고, 눈에 미처 다 담을수도 없을 만큼 빛나는 물결. 입담으로만 건내 들었기에 그 상상에는 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하나둘 덧붙여지는 살들만 있을 뿐, 깎여 나가는 것이 없었다. 왕천은 그것이 좋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이토록 기대를 품을 수 있다는 점이.

 

"바다에 가서 회라는 것도 먹고 ... 낚시! 바다낚시도 해야겠지."

 

손가락으로 굳이 하나하나 잊지 않으려고 세어보니, 그 갯수가 부족할 따름이었다. 그간 가야지, 해야지 하고 다짐했던 것들을 더 이상 미루지 않아도 되었다. 왕천은 모든 무림인들이 모여 힘을 합쳤던 강진 토벌전 이후, 곧장 가까운 해안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존에게는 서신을 보냈고 그리운 이들과는 짧은 인사를 했다. 해안가를 향해 왕천 특유의 무게가 실리지 않은 발걸음이 딛어졌다. 목적지에 가까이 갈수록 묘하게 코를 간지럽히는 소금기 짙은 냄새가 반겼다. 왕천은 약초의 향과는 또 다른 느낌의 향에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두어번 감았다 뜬 앞에는 전혀 색다른 풍경이 반겼는데, 녹빛이 가득한 산림과는 또다른 푸른 자연의 향이었다. 완전한 청색보다는 녹색과 청색이 섞인 녹청빛이 돌았다. 짙고, 그 깊이를 알 수 없은 일렁임을 보며 왕천은 눈을 크게 깜빡였다.

무거운 짐을 줄곧 들고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바다를 눈에 담고나니 그것이 크나큰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왕천은 사박사박,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신고있던 신발은 어느 새 벗어던졌고 걸치고 있던 옷들을 하나둘 벗어, 금새 내의가 드러났다. 아직 이른 새벽, 생각보다 옅은 안개가 서늘하게 다가왔다. 일렁이는 파도와 찰박이는 소리. 그리고 그것들을 제외한 모든것이 고요했다. 넓은 모래사장에 홀로 서있었다. 파도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분명 시간을 흘러가고 있는 것일텐데. 어째서일까. 왕천은 지금 이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한 발. 두 발.

 

이미 수련을 통해 맨 살갗에 흙이나 모래알갱이의 감촉은 질리도록 익숙해져 있을텐데도. 웃음이 나왔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한 없이 깊고, 두려워서 차마 배를 타야지라는 생각을 덜컥 수정하려 했었다. 그런데 파도에 발을 담그고 모래 사장을 거닐며 해안가에 있으니, 크기만 했던 바다가 썩 낯설지 않았다. 나무 여러그루를 모아둔 숲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허리를 숙여 모래에 붙어있던 조개껍질을 하나 집어들었다. 색이 까만 것이, 같은 문파의 이들 여럿이 떠올랐다. 그들도 각자의 짐을 가졌고, 신념을 가졌으며, 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터였다. 이리 떠나기 전에 더 살갑게 대할 것을 그랬다며, 조금은 후회가 됐다. 자신의 짐이 가장 크고 무거운 줄만 알아서, 막상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던 것이 영 마음에 남았다. 조개 껍질이 움튼다고 느끼는 찰나, 껍질 틈에서 물이 픽! 하고 나와 눈을 찔렀다. 무인이기에 순발력 하나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기습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인지 왕천이 악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찍었다. 하필이면 파도가 막 치던 무렵에 넘어졌다. 벗어둔 옷은 무사했으나 내의가 모두 젖었기에 실소가 나왔다. 일찍이 비무대회를 위해 모였던 때, 현무진인과 있었던 일이 스쳐지나갔다.

 

"그때도 이렇게 꼴사납게 넘어지긴 했지. 지금 만큼 망신은 아니었지만"

 

바닷물을 흡수한 옷은 그 무게가 곱절은 무거웠다. 그렇다고 거동이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에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자신은 이미 성인이었고, 한 명의 무인이었으며 지금은 목표로 했던 바다에 도착했으니 그리 조급할 필요가 없었다. 바다를 보며 느꼈던 일종의 해방감, 그리고 더 큰 세계를 암시하는 끝 없는 지평선. 왕천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웅큼쥐어 보았다. 병을 고치고 누구보다 떳떳하고 대단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출사를 했고, 발길 닿는 대로 떠나며 방법을 찾아 헤맸다. 사실 강진과의 사투가 끝나고 난 직후에도, 왕천은 그 미련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동시에 신물이 났다. 어떻게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위신과 체면, 뭐 그런 것들. 일찍이 사존이 놓으라 말했던 것들을 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소유를 탐하며 손을 뻗었다.

어느 때에는 그것이 사존을 위해서라 변명했고, 또 어느 때에는 자신을 위해서라 변명 했다. 늘 마음이 찔리고 누군가에게 질책을 듣게될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자신은 변명을 했다. 누군가 들으면 청산유수라 생각될 정도로 정돈된 변명거리들. 하지만 그것이 변명일뿐이라는 것은 듣는 이 모두가 알았다.

 

 

왕천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벗어두었던 옷을 팔에 걸쳤고, 젖은 내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바다를 본 순간부터 왕천은 자신의 병을 고치길 그만두었다.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졌는데 어찌 하나의 몸으로 모두 둘러볼 수 있을까. 분명 방도가 있겠지만, 운이 없는 자신에게는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이미 독초를 삼켜서 살아남은 것이 일생일대의 운이었으니, 더 큰 운을 바라는 것은 사치이기도 했다. 그간 자신의 상황만 돌아보며 스스로의 불행만 가엾게 여겼다. 못난 모습이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기에 더 큰 깨달음이 필요했다.

왕천은 멀지 않은 해안가의 마을에서 옷을 사서 갈아입었다. 평소에도 이미 검소한 옷차림이었으나, 새로 갈아입은 옷은 더욱 검소했다. 색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흑색과 백색뿐인 옷. 그토록 좋아하던 털은 가게에서 처분했기에, 왕천의 모습은 꽤 가벼워보였다. 사존이 준 호신용 도가 한 자루, 선물로 받은 머리끈이 하나, 눈에 익은 노리개 하나. 기존에 있는 것이라곤 그런것들 뿐이었다.

 

"인연이라면 또 만날테고, 그렇지 않아도 만나겠지."

 

왕천은 그날 들어온 배 편을 타고 눈에 담았던 그 짙고 깊은 바다의 위를 올랐다. 앞으로의 여정과 시간동안 자신에게 더 변명하지 말자 염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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