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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의 생 | 정이준 | 06.08
정한은 감히 생각했다. 자신이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여러 사람을 만나왔다고. 허울만 좋은 사람, 제 앞길만 걱정하는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예시를 든 건 모두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아무튼, 정한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사람도 그러한 부류인가? 자문해봤다. 답은 아니었다. 물론 무책임한 말을 뱉지만, 천성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아냐고 묻거든, 그냥 어쭙잖게 말에서 묻어나는 내려 때문이겠죠.'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의 이준을 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옷자락을 가만두지 않는 저 사람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 말한 허울 좋은 사람, 제 앞길만 걱정하던 이와 이준을 나누는 가장 결정적인 것은 죄책감의 여부였다. 최선을 다했으나, 그런데도 살리지 못한 사람에게 가진 우울의 감정.
"무책임하지만, 그 이상으로 질책할 생각은 없었어요. 당신 얘기를 들을수록, 비난할 마음도 없으니까 걱정 말라고 당부하고 싶네요. 싫어하는 사람이야 있었겠죠"
'없을 수가 없죠.'라는 말은 차마 하지 않았다. 네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말을 꺼내는지. 그게 궁금하기만 해서, 골똘히 얼굴을 보았다. 책망할 생각도 없었는데, 애먼 사람을 질책한 기분이 들어 정한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죽지 않게 '돕는' 것이 네 일인데, 인명재천을 떠나 살리길 바라는 이가 없을까. 필연적인 죽음에도 네 탓을 하는 사람이 있었을 터, 이준이란 사람이 무책임한 사람이 된 것 … 어찌 보면 당연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 너는 이야기를 듣되, 상담에 적합하지 않구나. 정한이 홀로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겠단 말엔 손을 저었지만.
"이해해주는 건가요?... 이러면 또 무책임하단 말을 정정할 필요가 있네요. '애매하게 무른' 사람 정도로 수정해드릴게요 이준 군"
애매하게 물러서 여기 머물고 있으니, 박차고 떠날 때가 궁금하기도 했다. 정한이 눅눅해진 제 손을 서늘하게 만들며, 마저 입을 열었다.
"그런 단점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여러모로 튼튼해졌잖아요? 그래서 장점만 있을 거라 생각했나 봐요. 나는 여기 와서도 제법 마셨거든요. 취하지 않길래,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숙취도 없길래. 하지만... 취하고 싶을 때 못 취하게 됐단 사실을 알았으니, 좀 생각해봐야겠네요. 나름 똑똑했던 이준 군은 그럼, 여기의 와인 바에 아직 안 가봤을지도 모르겠네요. 두루미 신수가 테킬라를 준답니다."
거의 오자마자, 들이닥치자 시피 와인 바를 털었기에 그 구조와 안내를 훤히 알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쉽사리 친해지는 길에 달리 무엇이 있을까?... 밤새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마시며, 현대 사회에서의 전우애를 논하는 것만큼 빠른 방법이 없었다. 물론, 강해진 육체와 정신은 정한의 사회적 체면을 지켰다. 여기 와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이준의 말에, 정한은 내색하지 않았어도 제법 놀랐기에 속으로 '그렇다면, 이참에 금주를 권장해도 좋겠네'라 생각했다. 노숙의 굴레도 겸사, 기숙사가 생겼으니 하지 말라 해보고. 추레한 행색도 멀끔히 다듬어 보라고. 첫날, 공항에서 생각했지만 제 직업병 때문에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잘 되길 바랐다면, 더 미안한 걸요. 억지로 희생했는지는 못 물어봤어요, 그저... 미안해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죠."
그래서 더 미안했다. 잘 되길 바랐다는 걸 알아서, 이미 알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정한은 귀걸이에 걸린 솔을 주물렀다. 미안해하지 말라던 말이 귀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희생이 아닌, 선물로 생각해 달란 말도 떠올랐다. 단지, 떠오르기만 했다. 언니가 언니들이. 어떤 표정과 어떤 마음으로 제게 그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모두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싫어하고, 시기하며 원망하더라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잘 됐다면. 그랬다면 언니가 날 원망하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해요."
실없는 생각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은 특히나 어수선했다. 어제의 일이 이어져, 시종일관 재밌는 문제가 터져 나왔다. 정한은 말을 바꾸어 식단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김치찌개 보셨나요? 돼지고기와 김치가 없는 김치찌개는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정한은 덤덤히 생각했다. 자신이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여러 사람을 만나왔다고. 허울만 좋은 사람, 제 앞길만 걱정하는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예시를 든 건 모두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아무튼, 정한은 자신은 어떠한가? 자문해봤다.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사실 무책임한 사람은 자신일지도 몰랐다. 천성이 나쁜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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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의 생 | 훈.련.실.패.| 06.10
선우정한은 쥐고 있던 창을 집어던졌다. 얼음으로 만든 창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작은 설원처럼, 온통 하얀 훈련장에 정한이 소리쳤다.
" 말이 돼? 이게 말이 되나요? 이렇게 실패를 한다고? "
저 멀리 떨어진 과녘에 정한이 던진 수많은 얼음 창의 잔해가 보였다. 하나같이 괴기한 모습으로 떨어진 창은, '죽 ... 여 ... 줘 ...'라고 말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 손으로 하는 건 대부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 "
정한이 다시 얼음 창을 만들었다. 과녁 바닥에 나뒹구는 얼음창과 하등 다를 것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지만, 정한은 힘껏 창을 던졌다. 하나 못해 과녁에 꽂히기만 해도 좋았다. 저 깔끔해서 짜증 나는 과녁판에 단 하나의 창이라도 꽂아야겠다! 정한은 '운동 절대 싫어…'라던 말을 잊을 정도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붕—, 하고 날아가는 얼음 창의 도착지는 아쉽게도 과녁이 아니었다.
갈아입은 훈련복이 땀으로 젖어, 움직이기 불편했다. 조그만 설원같던 훈련장은 정한에게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현무의 힘을 깨닫고, 잘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 추위에 무뎌졌다. 그 장점으론 동상과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단점으론 …
" 덥잖아요… 여기서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풀썩, 바닥에 누운 정한이 볼멘소리를 냈다. 정한에겐 신조가 하나 있었는데, 이는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 할 수 있고 잘하는 건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지만 못하는 건 시도하지 않기 ' 였다.
따지 못 할 감나무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딱 그 말대로 였다. 정한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반대로, 좋아하지만 잘할 수 없는 일은 빨리 포기했다.
' 왜냐면 절망하니 까요. 시간 낭비기도 하고. '
어쭙잖은 마음이 미련과 후회를 부른다고, 정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빨리 털어내면 낼수록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종종 주변 사람들이 이로 인해 고민하면, 정한은 잘 이해되지 않는단 생각을 가졌었다. 잘할 수 없는, 재능 없는 일에 왜 그렇게까지 심취하고 몰두하며 쓸데없는 시간을 투자하는 거지? 화롯불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 아, 아름다워. 땅에서 피어난 구름과 태양이야!' 라며 돌진하는 하루살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현재, 정한은 잔뜩 구겨진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말했다.
" 실망 이에요, 정말 실망했어요. "
정한은 세율부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러니까 … 서강현에게 처음 안내책자를 받았을 때 이미 깨닫고 있었다.
" 알면서, 나도 이렇게 불합리한 짓을 반복하게 되다니. 내 꼴이 말이 아니네요, 비웃었던 사람들과 뭐가 다른 건지 "
자신이 할 수 있는 세율부의 일은, 현무로서의 일은, 정말 최악이자 최저의 수준이라고. 누군가 자신에게 '기대'라는 걸 했다면, 정한은 기꺼이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물론 부응하고 싶단 마음과, 부응할 수 있다는 명제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정한이 벌떡 일어나, 다시 얼음 창을 만들었다. 아까와 달리 그 크기가 작고 '무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뎠다. 하지만 정한은 그 작고 여린 창을 들어, 과녁으로 던졌다.
그리고 후자가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가운데, 정한은 날아가는 창을 직시했다.
드문 일 이었다. 아니, 처음 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신조를 어겨가면서 이렇게 미련을 잡고, 열심히 하는 건 처음이었다. 잘 될 거라는 보장이 없었지만, 잘하고 싶었다. 반강제였지만, 되도록 세율부의 일을 즐기면서 하고 싶었다. 겸사, 세상도 구하면서 말이다. 창이 떨어졌다.
정한의 창이 떨어졌다, 정한의 창窓이 떨어졌다. 과녁의 정중앙이 아닌, 가장 끄트머리에 떨어졌다. 정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작은 설원에, 오직 정한이 홀로 서있었다. 뿌듯함이 아닌, 억척으로 해낸 결과였다. 정한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훈련장을 정리했다. 만들었던 눈을 모조리 녹이고, 과녁에 꽂힌 창을 뽑고 바로 했다. 얼추 정리하고 훈련장을 나서려던 정한이 멈췄다. 훈련장 입구에 놓인 작은 친구들. 정한은 손을 까딱여, 작은 눈구름 하나 놓아주곤 자리를 떠났다. 훈련장은 방금까지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적막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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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의 생 | 선택미션 | 0611
하품을 길게 하며 복도를 지났다. 정한이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긴 곳은 훈련장이었다. 이른 새벽, 사람이 없는 훈련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정한이 장갑을 끼고 앞뒤로 손을 흔들면 사르륵. 불규칙한 입자의 눈이 흩날렸다. 마치 *울 왕국의 주인공, *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좀 더 빠르게 손을 움직이고, 세심하게 손가락을 튕기면—
까드득, 까득, —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딱딱한 얼음이 지면에서 앞으로 번졌다. 날카롭고 뾰족한 얼음을 손 끝으로 만지면 …
" 여기 찔리면 죽겠는데 …? "
처음 정한에게 능력이 생겼을 때. 정한은 자신에게 수족냉증이 생긴 줄 알고,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 는 차나 음식을 챙겨 먹었다. 추위에 무뎌져, 수족냉증인지 아닌지도 분간이 안 될 무렵 서강현이 찾아왔다. 정한은 처음 그를 보고 생각하기를,
' 저렇게 힘없고, 피곤한 관상의 사람도 참 보기 드문데 말이야. 나 만큼이나 지쳐 보이네. 근데 하는 말이 왜 저렇게 사이비 교주 같을까? … 사기꾼? 그렇게 생기진 않았는데. '
정한은 서강현이 준 안내 책자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에게 생긴 문신도, 능력도. 모두 사방신에 의한 것이란 게 이 안내책자에 적혀 있었다. 하지만 글로 봐서는 감이 안 왔다. 올리가 있나? 과학과 현대 사회의 통념을 믿는 정한에게 사방신과 시귀란 그저 한낱 미신에 불과했다. 그저 어린 시절, 어르신이 아이들 놀라게 해주려고 하는 설화 이야기와 닮은 미신.
그랬던 정한이 세율부에 왔다. 세율부의 현수부 소속으로 일하게 되었다. 본래 입던 코트가 아닌, 세율부의 마크가 달린 코트를 입었고 세율부 소속을 알리는 노리개를 착용했다. 염원도에 있는 세율부 본부는 … 정한을 완벽하게 꼬셨다. 꼬셨다, 이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을 거다. 정한은 기숙사 침대에서 다섯 번 구르고, 식당에는 신발이 불나도록 오갔으며 정원에선 늘 낮잠을 잤다.
시설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본격적으로 시귀를 퇴치하지도 않았는데, 주어지는 복지가 상상을 초월했다. 쥐미상궁이 난리를 친 때도, 정한은 좋았다. 오히려 각양각색, 미지의 요리를 먹을 수 있어 즐거웠으리라. 정한의 삶은 세율부에 오고 큰 반환점을 맞이했는데 …,
" 시설도 좋네요. 음식도 맛있어요. 즐거운 분도 많고요. 하지만 …, "
하지만 정한은 아직도 자신이 낯설었다. 손 한 번 흔들면 눈이 내린다. 입김 한 번에 들고 있던 잔의 커피가 얼었다. 정한은 신기하고 놀라웠던 감정이 무더 졌다. 정확히는 '두려움'으로 변질되었다. 어디까지 얼릴 수 있을까, 언제까지 눈을 내릴 수 있을까? 는 '모두 얼려버리면 어떡하지?'와 '눈이 멈추지 않으면 어떡해?'로 이어졌다. 세율부에 들어오고 난 뒤, 훈련을 거듭하면 할수록 정한의 불안은 깊어졌다. 심심하면 눈사람을 만들며 모두와 시시 껄껄한 농담하는 게 낙이었는데.
현수부 수련장 입구 근처에 있는, 작고 귀여운 눈사람을 보았다. 동글동글, 못났지만 귀여운 생김새의 눈사람을 한참 동안 보았다. 이 눈사람을 만들 던 때의 즐거움은 어디로 갔을까. 훈련을 거듭할수록 단단해지기는 커녕, 왜 더 물러지고 주저하게 되는 걸까. 정한은 한참을 서서 눈사람만 보았다. 여기에 오기로 했던 게 잘못은 아니었을까. 왜 자신이 현수부의 사람으로 선택된 걸까. 자신의 염원은 … 다른 많은 이를 제치고, 이곳에 설 만큼 절실한 염원이 맞는가. 어스름히 떠오르는 빛이 눈사람을 비췄다. 돌아가야지, 정한이 자리를 벗어났다. 언제나와 같은 도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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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의 생 | 훈.련.실.패.(2)| 06.11
정한은 사실 조바심이 났다. 잘할 수 없는 일을 이리 몰두하는 게 처음이며, 주변에(?) 일취월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정한은 자신이 만든 고양이였던 것(?)을 보았다. 며칠 전 있었던 세율부의 요리대회. 정한은 <배달의 민조>가 선보인 요리, [ 꿈을 꾸는 고양이 ]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귀엽게 생긴 고양이는 죽은 주인을 그리워하고, 결국 … (생략)
정한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서 썼었는데, 그 검은 알 너머로 흐른 물줄기가 비인지 눈물인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다. 정한은 그날 이후, 그 고양이를 잊을 수 없었다. 감동적인 이야기였어, 하고 흘러 보내기엔 그 초롱하던 고양이(요리)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주야장천 현수부 사람을 본떠 만들던 눈사람은, 이 때문인지 점점 동물의 형태를 갖췄다. 저건 곰, 이건 정어리, 저건 … (하리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아기 용(용용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정한 뿐이었다. 훈련장을 기웃거리던 이는(당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 저게 동물 ...? ... 비명을 지르는 구인류가 아니란 말이야? 종이접기는 잘 접었는데 왜 동물 눈사람은 초현실주의??? '
정한이 고양이(눈사람)를 만들었다가 그만뒀다가, 다시 도전했다가. 이를 여러 번 반복하니 손목시계의 단말에서 알림이 울렸다. 저녁 시간을 잊지 않으려고 설정해뒀던 것이었다. 정한이 하품 두어 번, 기지개 길게 한 번. 팔을 양 쪽으로 한 번씩 크게 돌린 뒤 훈련장을 정리했다.
현수부 사람모양의 눈사람 옆으로, 괴기(?)하지만 눈이 반짝이는 고양이 눈사람이 자리했다. 달 너머, 엄마가 된 주인과 함께 고양이는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정한은 분명 달엔 토끼도, 고양이도. 그 어떤 생명체도 자리할 수 없단 걸 알았지만 이야기의 힘이란 무서운지라. 무심코 그의 행복을 빌어주게 되었다. 과학을 신봉하고, 사실을 믿음에도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공감하게 되었다. 선하고 착한 이가 보상받길 바랐고, 노력하는 이는 그에 마땅한 보상을 받길 바랐다.
" 내일은 엄마 고양이(눈사람)도 만들어야지. "
떠나는 발걸음이 사뭇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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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야기 였어 … -선우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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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의 생 | 여우별 | 06.11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다. 문장 그대로, 정말 많은 사람이 이 별에서 땅 딛고 산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 거기엔 다양한 생각이 모였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이야기도 함께.
정한은 눈앞의 사람을 보았다. 얼음과 눈의 책략가는 분명 자신이 되어야 할 텐데. 눈앞의 사람이 더 매섭게 시렸다. 한 겨울, 아주 어릴 적의 정한은 학교에 갇힌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폭설로 전교생이 학교에 갇혔다. 그때, 정한은 처음으로 뼈에 스며들 정도로 춥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꽁꽁 언 손에 얼음이 닿으면 추위가 아닌, 살갗이 화끈 거리는 뜨거움이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리고 지금, 정한은 어째서인지 그 무렵의 추위를 떠올렸다. 그 싸늘함과 견고한 추위를 느꼈다. 네게 해는 뜨지 않는 걸까. 아니면 뜨지 못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거기서 그저 등 돌린 채 서 있는 걸까. 어찌 되었건, 정한은 우별을 보았다. 무례하다고 화를 내야 할까. 저 비웃음에 저 또한 화를 내야 할까.
정한의 속을 까드득, 긁는 말이 귓가에 박혔다. 막 내린 눈밭. 너는 신발로 짓이겨, 회색빛으로 만들고 있구나. 정한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고슴도치 같은 사람.
" 재미없는 사람보단, 웃긴 사람이 좋죠. 설교로 들렸나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적어도 당신이 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한 번 생각해줬단 거잖아요? 그럼 됐어요. 앞으로도 난 당신에게, 당신이 '설교'라고 하는 말을 계속 말할 거예요. 싫다고 하더라도 뭐, 별 수 없죠. 이해해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해서 당신도 날 이해하는 건 아닐 테니까 …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부 하세요. "
정한이 서늘한 표정으로 널 보았다. 화가 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진 그 말들이 속을 긁어내리고, 칠판 긁듯 껄끄러운 마찰음을 내긴 했으나. 그래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몰아치는 그 눈보라가 걷히면, 그땐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영영 그치지 않고 몰아칠 수도 있겠지만. 각자의 삶이 이토록 다채로운데,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이리 모였지 않나. 정한이 우별에게 오른손을 건넸다. 악수라도 하지 않겠냐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서늘한 낯에, 입꼬리 한 번 올리니 금방 분위기가 달라졌다. 언제 그리 매몰찬 말을 했냐는 듯,
" 혹시 내게 기대하는 게 있다면 솔직히 말하는 게 좋아요. 난 돌려서 말하면 모르는 척하거든요. "
지금도 마찬가지랍니다. 정한이 뻐끔뻐끔,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만 움직였다. 정한은 사실 화를 낼 줄 모른다기 보단, 화를 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지금의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직 깨닫지 못한 감정에 휘둘릴 필요가 없기에 그저 언제나와 같이. 이름 모를 감정을 두고 도망쳤다. 화합, 화목, 화친. 긍정적이고 자신이 아는 감정으로 서둘로 달렸다. 그래서 우별에게 건넨 손이 미약하게 떨렸고, 가슴이 얹힌 듯 답답했다. 선의가 호의로 다가오는 삶만 살던, 시련이라 할 것 없는 삶을 산 정한.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네가 이렇게 된 이유가. 천성이 이러지 않았을 텐데, 무엇이 널 이토록 바꿨을 지가 궁금했다. 정한은 그래서 참을 수 있었다, 도망칠 수 있었다. 그 이름 모를 감정을 외면하면, 널 알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엔 여러 사람이 있다. 문장 그대로, 정말 여러 사람이 이 별에서 땅 딛고 산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 정한은 궁금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이야기가 존재한다면, 너는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너의 이야기는 어떻게 막 내리고, 기록될까. 너의 이름 석자와 생에, 선우 정한은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단지,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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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의 생 | 두승연 | 06.12
정한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별을 읽어서 길 찾은 적이 없었다. 손목에 달린 단말기가 언제나 길을 알려줬다. 별을 사랑했지만, 하늘만 올려다보았지만. 정한 스스로가 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정한은 별의 이치가 궁금했다. 아직 정체를 다 밝히지 않은 암흑 물질에 관심이 있었다. 사상지편의 너머도 궁금했다. 그래서 앉아, 펜 굴리는 일이 잦았다. 실제 누군가가, 별을 이용해 길 읽는 방법을 안다—는 말은 정한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러니, 승연을 보는 정한의 표정엔 묘한 기대감이 차있었다. 군인일 줄은 몰랐으나, 한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것의 파편을 엿볼 수 있어서 기뻤다. 정말 … 빌어먹게도 기뻤다.
" 그렇다면, 잊지 않게 바로 소원 빌게요. "
힌트를 많이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한은 소원을 빌 수 있단 사실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저마다의 염원을 가진 사람이 여기에 모였다. 그리고 승연은 정한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정한은 검지로 두어 번 제 턱을 두드리다 말했다.
" 그럼, 나중에 단 한 번이어도 좋아요. 무조건, 절대적으로, 제 편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
'언니에게 무리한 부탁은 아니죠?'라며 사족을 붙인 정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항상 그러지 않아도 됐다. 가족이 아니니까. 결국 타인이니까. 누구의 말마따나(정한은 여우별의 그 날카로운 말을 떠올렸다) 여길 떠나면 보지 않을 테지만. 그런데도 있었으면 했다.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온전히 자신을 믿어줄 사람이 있길 바랐다. 자신이 의심받거나, 어쩌면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신에게 손 한 번 내밀어줄 사람이 있길. 물론, 그런 상황이 오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해건술을 흔쾌히 보여주겠단 말에 정한은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럼 보여주는 그날, 기대하고 있을게요. 정한이 기쁨을 사그러뜨리고 답했다. 누구 방의 자물쇠를 따 달라고 하지. 용용이도 방이 있을까, 그렇다면 용용이 방을 …
" 색이 강렬하고, 눈에 띄죠. 원색이 강한 디자인이라 기억에 남아요. 디자인이 촌스럽긴 해도 안전의 측면(?)에선 좋다고 생각했고요. "
조 얘기에 검지손가락을 척— 들었다. 1조, 밥좀조였다며 후다닥 입을 열었다. 분명 자신은 이것저것 수상한(…)재료를 넣고 싶었지만 제지당했다는 말과 함께.
" 그러게요, 그건 생각 못해봤는데. 흠… 그럼 역시 여길 관광지로 개발시켜서 가게를 열어야 할까요? 마스코트 용용이를 포기하기엔 대체할(?) 신수가 없네요. "
정한이, 철저하게 용용이를 이용해 먹을 생각만 했다. 마스코트로 간판 디자인을 뽑고, 용용이 말투로 *스타그램을 운영하는 등으로. 정한은 이렇게 여러 얘기를 하고 있으면, 지금 순간이 영원하게 느껴졌다. 내일도 분명 이런 일상일 테니까. 그럼 한 달 뒤에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1년 뒤엔 어떻게 될까. 승연과 함께 신나게 떠들고 있지만, 속으론 언제까지 이런 일상이 이어질지 궁금하고 두려웠다. 다치진 않겠지, 또 너무 빨리 헤어지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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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의 생 | 박지수 | 06.20
말의 무게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천지차이다. 그리고 바람뿐인 말은 언제나 가볍다. 정한은 가벼운 말을 좋아했다. 그리고 동시에 무거운 말도 좋아했다. 언제나 적당히, 균형 이루는 게 좋았다. 과하거나 모자람없이. 사람 취향도 비슷했다. 너무 가벼운 말은 때때로 갈증이 났고, 그 말을 뱉는 사람의 저의를 의심케 했다. 당신, 알고 있죠?
"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제법 좋은 사람인걸요. 자기 평가가 원래 박하신 분? 하지만 그렇게는 또 안 보이는데. 후후, 과거에 정말 큰 일을 벌인 게 아니라면 이제 그만 자기를 용서해주는 건 어때요? 설마, 정말 친구들 삥 뜯고 그런 건 아니죠? "
정한은 눈 앞의 이가 제법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과 비슷한 부류였으니까. 입담으로 먹고살고, 뻔뻔함으로 무장하고 사람 틈에 녹아드는 모습이 몹시 익숙했다. 다른 점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자신은 일직선으로 달렸고 그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나아간단 점?
" 어머, 아니요. 아직 말 안했어요. 언니들만 알아요. 근데 … 이것도 첫째 언니랑 둘째 언니만 알고 있는 거라서. "
그래서 난리가 난 단말은 잠시 벨소리를 꺼두었다. 연일 징징, 울리던 진동도 무음. 원래도 연락이 잦았지만, 이번 연락은 특히나 내용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받고 싶지 않았다.
" 좋아서 했죠. 쫓기듯이 한 것도 맞고요. 누가 등을 …떠밀 …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근데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서. 그래서 빨리 지쳤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
좋아했다. 재능도 있었고, 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물론, 실제로도 그 성취는 놀라웠으니 과거의 정한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프라이드도 높았다. 목표로 했던 도착점은 한없이 가까워 보였고, 조금만 더 달리면 될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생각으로 한참을 달리도록 채찍질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환경도 환경이었지만. 여유가 없었지만, 자신이 이룬 걸 보면 즐거웠다. 자신의 계산이 들어맞았을 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단지 자신은 바로 코앞의 성취 때문에 잊었다. 왜 이 일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왜 빛나는 별 한 점을 보고 즐거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는지.
" 그 조언은 고맙게 받을게요 지수 군. 지금은 …그래서 일을 바꾸긴 했지만 잘 모르겠어요. 결국 여기서도 쫓기는 기분이라서요. 뒤쳐지거나 늦춰지면 안 돼, 달려. 멈추지 마. 라고 나에게 계속 되뇌게 돼요. 돌아가도 똑같을 텐데, 지금도 과거와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게 뭐… 쓸쓸하다면 쓸쓸하네요. "
도망쳐서, 정한이 급히 손에 쥔 것도 결국 같은 끝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제 몹쓸 버릇은 건재했다. 그래서 세율부의 일을 전해듣자마자 도망쳤다. 겸업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정한이 샵을 넘긴 큰 이유였다. 언제나 정한은 도망쳤다. 감당하기 힘든 일에 곤두박질 칠 때면 … 등 돌려 왔던 곳으로 다시 뛰었다.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은 어쩌면 괜찮을지 모른다고 자기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 논문용 어휘라서, 여행 가기 직전에는 다시 훑어봐야해요. 실생활에서 쓰이는 회화는 또 다르거든요. 유행도 빠른 편이고? 아, 면허는 수능 끝나자마자 땄어요. 그래서 면허 따고 바로 운전했다가 언니 장례 치를 뻔했죠. 후후, 그때 고속도로에서 만난 *******놈을 ****어야 했는데. 어머,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
정한이 방긋 웃었다. 때는 바야흐로 8년 전, 정한이 처음으로 면허를 취득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 언니의 성화에 못 이긴 채 운전대를 잡았다. 멀지 않은 곳의 다른 언니 직장을 향해 출발한 차량은 고작 10분 만에 다른 차량과 사고가 났다. 박은 사람은 놀랍게도(정말 놀랍게도) 정한이 아닌 다른 운전자였다. 차량 뒷면에 붙여둔 '초보 운전'을 본 한 운전자가 시비를 걸다, 되려 운전미숙으로 정한의 차를 들이박았다. 사건은 생각 외로 빨리 수습됐지만, 이후 정한은 지금까지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잘할 수 없는 일에 매진한 결과를 목도해버려서, 어쩌면 운전에 질렸을지도.
" 아무튼 지수 군만 믿을테니까요. 지수 군 운전 경력은 얼마나 되나요? 설마 군대에서 운전병이셨나요? "
그리 말하며 정한이 지수를 보았다. 자신과 결이 같지만, 낱낱이 놓고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른 사람. 정한은 그가 신기했고, 동시에 작은 호기심이 튀어나왔다.
말의 무게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에 가볍거나 지나치게 무거워진다. 그리고 바람뿐인 말은 언제나 가벼우니, 정한은 가벼운 말을 뱉는 이가 어떤 저의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사람이 뱉는 무거운 말이 궁금해졌다. 사람의 이유에는 저마다 '이유'와 '원인'이 존재했다. 정한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자신이 봐온 세계가 그러했고,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일까? 너무 가벼운 말은 때때로 갈증이 났고, 그 말을 뱉는 사람의 '삶'이 궁금했다. 당신, 어떤 삶을 살았나요? 정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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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은 언제나 받기만 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모두가 제게 손을 내밀었고, 일으켜 세워줬다.
염원의 생 | 차도경 | 06.24
" 언니, 친구가 얘기를 해도 공감이 안 가는데 어떡해? 지루한데 일단 친구니까, 듣긴 듣는데 … 그 시간이 고역이야. "
정한이 턱을 괴곤 푸념을 털어놓았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이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정한에게 잔 하나를 내밀었다. 이나가 최근 취미로 만드는 레몬청 에이드였다.
" 왜? 그 친구가 무슨 얘길 했는데? "
이렇게 종종, 정한은 자신의 첫째 언니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대가족이지만 첫째 언니는 결혼을 하여 출가외인이 되었다. 본가에서 멀지 않은 곳, 정한은 언니의 집에 찾아가길 좋아했다. 늘 친절하고 정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으니까.
" 그냥…, 같이 스키 타러 가자고 했는데 집안 형편이 안 좋다고 거절하는 얘기. 근데 후자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영어 단어 외우면서 들었어. "
정한이 레몬청 에이드를 한 입 들이마시곤 말했다. 최근 들어 이런 일이 잦았다. 시험도 끝났겠다, 고등학교 진학 전 마음껏 놀러 다니고 싶었는데 꼭 친구 한 명의 사정이 어렵다며 취소됐다. 고작해야 스키장, 고작해야 1박 2일의 여행이 취소되어서 그럴까. 정한은 테이블에 늘어져, 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지루해, 재미없어. 주변에 친구야 많았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건 늘 지루했다.
" 뭐…? "
이나는 자신이 들은 말이 이게 맞나? 싶은 표정으로 정한을 보았다. 물론, 정한은 테이블에 엎어져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나가 정한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 그래서 그 친구는 뭐라고 했는데? 이야기는 어떻게 끝났어? "
정한은 자신을 일으키는 이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다급한 질문에 얼떨떨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끝났더라…?
" 어…, 그냥 미안하다고. 자기 두고 놀러 가라고 해서 알았다고 했지? "
그래서 정한은 '그' 친구를 제외한 다른 친구를 모아 여행을 계획했다. 여행은 불과 일주일 뒤였다. 이 이야기가 나온 건 무려 2주 전이었다. 굳이 언니를 찾아와 고민상담까지 하게 된 이유는 … 솔직히 말해, 정한이 귀찮아서였다. 그 일주일 간, 친구는 자신이 여행에 가지 못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집이 어렵다. 부모가 아닌 조부모와 살고 있다. 자신이 집을 비우면 집안일을 할 사람이 없다, 뭐 그런 설명들.
정한이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이나가 엄한 표정으로 질책했다.
" 너, 언니가 했던 말 하나도 안 듣고. 그동안 계속 이런 됨됨이로 지냈니? "
" 이런 됨됨이라는 건 뭔데? "
이나의 날카로운 말에 정한이 툭, 불만을 뱉었다. 기껏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돌아오는 말이 책망이었다. 이해도 안 될뿐더러, 자신의 편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기에 떨떠름했다.
" 너는 '너'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잖아. 그 친구의 사정을 헤아려 보고자 했니? 이해해보려고 시도는 해봤어? 네가 당장 불쾌한 것만 생각했지, 그 친구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았잖니. … 실망이야 정한아, 언니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
정한은 잔을 어루만진 채 고개 들지 못한 채 그저 … 침음을 삼켰다. 언니에게 혼나는 일은 상당히 드문데, 이게 그렇게 까지 화 낼 일인가? 어리둥절한 정한을 보며 이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려줄게. 이렇게 해보고도 이해가 되지 않거든, 그땐 다른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언니가 알려주는 대로 …"
그래서 그날 정한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 어떻게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는지. 정한은 이 날을 잊지 못했다. 훗날 이 날의 기억이, 그 방법이 정한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겠지만.
**
" 손 잡는 법에 익숙해지면 그냥 응석받이로 자라게 된답니다. 손 잡아준 이에게 고마워하고, 또 그 마음을 기억해서 이후에 다른 이의 손을 잡아줄 줄 알아야 하거든요. "
이건 뼈아픈 실책에서 나온 말이었다. 정한이 방긋 웃으며 도경을 보았다. 저 나이 무렵에 자신을 어땠던가. 한참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잘난 줄 알았고, 뭐든 성공할 거라 자만했었고 의심이라곤 한 톨도 하지 않았는데. 제 모습과 정반대인 도경을 보고 있으면 정한은 무의식적으로 입술 끝을 깨물게 되었다.
" 이야기가 너무 급했나요? … 이게 내가 아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라서요. 도경 군을 이해해보고자 한답니다. 물론 싫다면 거절해도 좋아요. 강요는 당신도 싫어하니까요. 그렇죠? "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첫 째,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고 둘 째는 … 그 사람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리 하면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까. 정한은 도경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동시에 도경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게 궁금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다면 너는 조금 더 빨리 뒤를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우스운 제안이 아닌, 진짜 너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될까? 한 명도, 두 명도 아닌 정말 많은 이들이 널 필요로 하고 있다고. 허울뿐인 형제놀이어도 좋았다. 정한은 도경을 이해하고 싶었고, 나아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이들처럼 도경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정한이 도경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네가 잡는다면, 그렇다면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듯.
정한은 언제나 받기만 했다.
가만히 서 있는 정한에게 내밀어진 손은 언제나 소중한 이들의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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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의 생 | 적이림 | 06.26
정한이 높이 뛰어올랐다. 이림이 부순 조각에 발을 살포시 얹고 내려다보면, 과연. 이림이 흡사 야수와 같은 모습으로 정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 야만적인 사람 같으니라고. '
먼저 야만인처럼 주먹을 휘두른 정한이었으나 이는 생각지 못하고, 이림을 고까운 눈으로 보았다. 닿을락 말락 한 공격이 모두 치명적이었다. 숨 고르려 하면 날아오는 주먹과 발차기에 정한이 서둘러 뒤로 빠졌다. 이림이 이를 노렸다는 듯 빙글 돌아, 정한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 헉—, "
짧은 단말마를 뱉은 정한이 벽에 처박혔다. 얼마나 강하게 쳤는지, 벽에 금이 가 파편이 튀었다. 정한이 마저 고개를 들려는 차 였다. 이림이 마저 주먹을 뻗어오는 게 보였다. 정한이 그것까지 맞아줄 생각은 없었던지라, 옆으로 몸을 크게 틀어 피했다. 반동으로 코트가 펄럭였으나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림에게 걷어 차인 옆구리는 필시 흉흉한 색의 멍이 자리할 것 같았다.
" 원래 이런 식으로 무식하게 대련을 하시나요? "
잠시 숨이라도 고르겠다고. 정한이 없는 여유를 끌어모아 비아냥 거렸다. 옅은 지식이었으나, 정한이 익히 들은 훈련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배움을 청한다. 이후, 각자 비무를 펼치며 서로의 부족함과 배울 점을 확인하는 것이 훈련이며 비무라고. 정한은 이를 떠올리고 나니 더 기분이 신랄했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이림에게 비무가 아닌, 그저 '싸움'을 걸었을 뿐이었다.
비무가 아닌 싸움에 배움이 있을리 만무했다. 이림이 답을 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자 했을까. 정한은 이림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이림과 자신의 싸움에 배움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을까?
' 간단하죠, 배움 없는 개싸움에 뭐가 있겠어요? '
자신은 이림에게 落의 감정을, 이림은 필시 자신에게 樂의 감정을.
' 웃기지도 않죠. 그래서 저 얼굴이 일그러지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는 게 '
그래서 정한은 이림을 보며 조소가 나왔다.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만 같은 저 자가, 어떤 표정으로 일그러지는지 보게 된다면? 그렇다면 정한은 이림에게 한 마디 할 것이 떠올랐다. 저 얼굴이 일그러지거든, 잔소리란 이름의 충고 하나를 던져줄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간다면 과거, 자신이 그러했듯 저 자는 도망가고 말 것이다. 지금, 이 싸움을 말하는 게 아닌 '삶'에서 도망가고 말 것이다. 어찌 아느냐 묻거든, 정한은
' 나도 그랬으니까요. '
라고 답했을 것이다.
" 그거 아나요? 대부분의 연상에게 난 언니라고 불러요. 하지만 당신에게만큼은 절대 불러주고 싶지 않네요. "
정한이 그리 말하며, 곧장 이림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직전, 이림이 정한의 옆구리를 찬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이림처럼 날릴 요량은 아니었기에 곧장 바닥으로 떨궜다. 쿵 —, 소리가 퍼지고 정한이 이림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일순 짜증 나—, 란 생각이 치밀었다. 자신이 당한 것에 비해, 이림은 너무나 멀쩡했다. 옷이 살짝 흐트러진 정도, 표정은 여전히 아까와 같은 야수의 모습이었다. 무엇이 그리 재밌을까. 무엇이 이토록 즐거울까. 언제든 다 놓아버릴 작정이면서, 왜 이렇게 제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는지.
" 마저 할까요? 아니면 그만둘까요. "
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너'는 누구 하나 죽고 나서야 싸움을 멈출 것 같아서 정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이 싸움을 어떻게 끝내고 싶어 할까. 어떤 방식으로 사냥감을 마무리 짓는가. 물론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이를 죽이고 싶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짜증과는 별개로 동료였고, 동료와는 별개로 정한은 … 적어도 친구라 생각했다. 물론, 이림의 생각은 추호도 들어가지 않은 정한 개인의 생각이지만. 그렇기에 이림을 바라보는 정한의 표정은 싸늘하되 온화했다.
명예 없는 싸움에 열광하라.
명예 있는 싸움에 환호하라.
눈앞의 싸움을 목도하라.
공포 2005 자
*디엠으로 찾아오시면 언제든 사과드리고 있습니다. 걷어찰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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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의 생 | 차도경 | 06.26
정한은 자신보다 작은 아이를 보았다. 또래에 비한다면 필시 작을 터인 아이는 한참을 입 다문 채 고민했다. 정한은 도경의 망설임을 이해했다. 섣불리 결단을 내릴 일이 아니기도 했으니까. 역으로, 자신에게 이런 권유가 왔다면 한참을 의심했으리라. 정한은 그저 손을 내민 채 기다렸다. 네가 잡는다면 언제까지고 끌어당길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란 사람은 참으로 오만했지만, 그래도 입 밖으로 낸 말을 어긴 적이 없었다. 이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 '신뢰'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천성이 그리 배워 굳어진 것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정한은 사람의 신뢰에 예민했다. 믿음이란 것은 돈으로 주고 살 수 없었고, 신용이란 하루 이틀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고 수치로 증명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덧없고 소중한지. 정한은 마른 침을 삼키고 도경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 아이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있는 걸까. 어떤 마음으로 정한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걸까.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니 더욱 이해해보고 싶었다. 이해하고 공감해주고 싶었다.
인간의 길고도 짧은 생에서 정한과 도경이 만난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정한이 도경에게 손을 내민 건 작은 변덕이었다. 정반대의 사람을 만나 이해한다면 죄악감 하나 덜 수 있을 거란 이기심도 물론 조금 있었고. 어쨌건 시작은 절대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땅을 내려다보는 저 작은 아이가 많은 고민 끝에 손을 잡는다면? 정한은 한 번이라도 좋으니 도망치지 않고 견뎌볼 수 있지 않을까. 만년설쯤 된다면 세율부의 모두는 아니더라도, 도경을 지탱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네게 말하지 못한 이기심을 목 너머로 삼켰다. 도경이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건 언제까지고 말할 수 없었다. 도경이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자신도 용기를 내야했다.
" 하지만 한 번 잡고나면, 장담하건대 쉽게 놓지 못할 거예요 도경 군. "
이 말은 정한이 도경에게 던지는 닻이었다. 도망치지 않기로 했으니, 정한은 닻을 내려 도경의 손을 잡았다. 확실히 닿은 손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서늘한 정한의 손과는 전혀 다른 온기였으나 정한은 녹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건 낭만 없는 생각이었으나 눈은 전기에 녹지 않는 절연체니까. 그러니 언제까지고 이 손을 잡고 너를 필요로 하고, 네가 필요로 하는 이가 되어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상호 공평한 게 좋았으니까. 네가 설사 탈출한 구석을 하나 남겨 놓는다고 해도 자신은 닻을 올릴 생각이 없었다. 배는 정착했고 앞으로 도망을 핑계로 출정할 일은 없었다.

공포 1313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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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은 오래전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잊고 있었으나, 다시금 떠올린 기억 하나. 훗날 그 기억이, 그 방법이 정한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겠지만.
첫 의문은 불현듯 들었다. 왜 집엔 자신의 물건만 가득할까. 분명 다른 언니들의 물건도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일까, 집을 둘러보면 자신의 물건만 보였다. 상장, 옷, 장난감, 잡동사니 할 것 없이 모든 물건이 정한의 것이었다. 정한은 문득 이 넓은 집에 자신만 사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자신을 포함해 9명이나 되었다. 실제 집에서 사는 이는 결혼하여 출가한 언니를 제외하면 8명이었다. 하지만 지독한 외로움에 정한은 침을 삼켰다. 집은 안락해야 할 텐데. 온기라곤 한 톨도 없었다. 가족은 언제나 일을 나갔다. 쉬는 날 줄여가며 일하는 가족을 보며 정한은 부지런 하시구나란 감상만 가졌었다. 그리고 지금, 정한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왜.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가족이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정한은 외로웠으나 품에 많은 물건이 들렸다.
자신의 방에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이미 집을 나간 언니인 '이나'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 정한은 19살의 여름, 막연한 불안감에 이를 외면했다. 떠올리지 말아야지. 나는 아무것도 몰라. 이건 … 나의 잘못이 아니야. 정한은 처음으로 도망쳤다. 내달리듯, 내리막길을 향해 달려 나갔다. 품에 안고 있던 물건이 바닥에 하나둘 떨어졌다.
도망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한은 결국 이나의 말을 마주해야 했고, 선택해야 했다. 더 도망갈 길이 없다는 점도 한몫했지만.
" 괜찮아요. 이제 제힘으로 해볼게요. "
정한은 도망가던 발을 멈추고, 해보기로 했다. 괜찮겠지, 할 수 있을 거야. 정한의 오만이었고 이는 곧 좌절로 이어졌다. 금전 없이 지내는 삶은 한계가 명확했다. 그래서 다시금 정한은 도망쳤다.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정한은 가족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었다. 얼마나 큰마음이었고, 사랑임을 알았으니 응당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었던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미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언니는 금전적 지원과 함께 이 말을 했다.
“우리가 네게 해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그동안 해줬던 것도 다 선물이라고 생각해. 희생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너무 불쌍하잖아. 우리 삶이 너무 덧없잖니.”
뒤늦게 미용사가 되었고, 이전과 달리 되돌려줄 재력을 가졌음에도. 정한은 돌려줄 곳 없는 마음을 끌어안아야 했다. 이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정한은 눈을 감았다. 그래서 기부를 시작했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 했다. 자신이 받았던 애정과 관심, 그리고 마음을 다른 이도 느끼길 바랐다. 그리고 자신이 이를 베풀며 올바른 사람이고자 했다. 그러면 이 무거운 마음 하나 덜어질 것 같았고, 도망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정한은 다시금 마주하기로 했다. 사람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기로 했다. 염원을 마주하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정한은 기꺼이 그리하기로 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망설이고 방황하더라도 뒤돌아보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보였다. 세율부의 동료와 친구를 보며 정한은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어두운 밤하늘에도 별은 뜬다. 정한은 이들의 손을 잡고 이끌어주고 싶었다. 빛 한점 없는 밤의 안내자가 되어 함께 나아가고 싶었다.




염원과 과욕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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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의 생 | 2부 선택미션 | 06.19
유독 좋은 날씨였다. 부는 바람이 적당히 선선했고, 하늘에는 흔한 구름 한 점 없었다. 섬 아래를 내려다보면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고 갈매기 서너 마리가 날아다녔다. 하늘에 떠 있는 이 섬은 정한에게 있어 '상식 외의 것'이었지만 … 하루 이틀 지내서 그런 걸까. 이제는 일상의 범주에 들어섰다.
불과 작년의 자신은 무엇을 했던가.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아직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출근하는 사람 틈을 지나 샵으로 갔다. 깜깜한 가게에 불을 켜고 청소를 시작하면 정한은 그제야 출근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오늘도 열심히 해야지, 힘차게 해 볼까! 하고. 그렇게 다짐하고 청소를 막 끝내면 하나둘 직원이 출근한다. 인사를 하고, 언제나와 같은 미소로 손님을 맞이한다. 이런 날이 매일 이어졌다. 정한의 성격에 비해 너무나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 그렇다면 훨씬 더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던가.
… 정한은 아침 해가 뜨는 걸 보며 초라한 목소리로 비속어를 뱉었다.
" 아, **… 뭐 했다고 벌써 해가 뜨냐 "
난잡하게 흩어진 서류를 대충 정리하고,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맡겼다. 지금 자면 얼마나 잘 수 있을까. 두 시간?... 식사를 알약으로 대충 때우면 세 시간은 잘 수 있으리라. 정한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던졌다. 탁—, 가벼운 소리를 낸 안경이 어딘가에 착지했다. 어쩌면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다. 미국 뉴저지에 위치한 단칸방. 오피스텔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곳에서 정한은 매일을 버텼다. 자기 키의 반절이 될까? 고작 크 창문 하나만 뚫린 방에서, 정한은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이 무렵, 정한의 염원은 단 한 가지였다. 성과를 내는 것, 그리고 지지 않는 것. 정한은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그것도 동양인 여성이 가쥘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무리 학과가 성과주의라 할지라도, 주어지는 프로젝트의 크기가 달라서 … 정한은 언제나 자신의 목표. 그러니까 … '염원'을 향해 박차고 달렸다.
적어도 그때의 정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열심히 하면 닿을 수 있는 '염원'이라고 말이다. 자신이 쉬지 않고 달리면, 빠르지는 않아도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이는 정한의 인생을 통 틀어 가장 큰 오판이었다. 이 사실을 정한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본래의 목적을 잃고, 오직 결과만 좇던 자신은 염원이 아닌 '과욕'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다시 돌아가 보자. 정한이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재'의 무대를 엿보자. '오늘'의 정한은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유독 좋은 날씨였고, 부는 바람이 적당히 선선해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하늘에는 흔한 구름 한 점 없어서인지 별이 잘 보였다. 섬 아래를 내려다보면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고 하늘에서 빛났을 터인 별이 … 바다에서도 그 빛을 뽐냈다. 정한은 묘한 생각이 들어, 억지웃음이 아닌 … 정말이지 상쾌한 미소가 나왔다. 하늘에 떠 있는 이 섬은 정한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행성'같았다. 물론 그저 떠있을 뿐인 섬이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이렇게 있으니까, 정말 신기하네. 달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이런 기분이려나. 반짝거려서 한참을 봐라고 해도 볼 수 있겠는데. "
가보지 못한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이런 기분일까. 당장 떠 있는 별이 정한의 머리 위에서 빛났다. 그런데도 고개 숙여 바다를 보면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알고 있다. 무엇이 염원이고, 무엇이 과욕인지.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큰 후회는 없었다. 이곳에 와서 모두를 만났기에 깨달았으니까. 일찍 깨달았다면 이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몰랐을 테니까. 그래서 즐거웠고, 동시에 두려웠다. 지금의 자신이 가진 염원은 모두를 생각나게 하니까.
" 다들 바보처럼 착하단 말이야. 순박하고, 귀엽고. 그런데 같이 있으면 또 재밌고 즐거우니까? … 원래라면 안 할 실수도 종종 하게 되고. "
뒤늦게 걸음마를 배운 것처럼. 나이만 놓고 보면 성인임에도, 세율부의 모두와 있다 보면 성장하는 자신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이 지금 가진 염원은 그들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우습게도 정한의 염원은 도망치고 나서야 싹을 틔웠다. 울음을 삼키고 캐리어를 끌고 가던 날. 비가 내려서, 어쩌면 공항에서 하룻밤을 지새워야 했을지 모르던 밤이었다. 죄책감과 좌절감에 삼켜져 꼴사납게 넘어졌을 때, 누군가 정한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 학생,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어머… 학생 울어요? "
그 작은 친절이 싹 틔운 염원에 물을 주었다.
" 아니 학생, 왜 거기서 울고 있어? 이리 와서 뜨끈한~ 생강차 마셔! "
바람 빠진 미소로 건넨 친절이 염원에 빛을 주었다.
정한의 염원은 그렇게 태어났다. 작은 친절과 배려, 그리고 사소한 용기로.
" 감사합니다 … "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는 자신에게 건네진 친절들. 사소하다면 사소했고,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닌 친절들. 이제는 세율부의 사람이 그 친절에 빛을 보태었다.
세율부의 어떤 선생님은 웃는 낯의 정한에게 작은 충고를 했다. 물론 정한은 그 따끔한 충고에서 그저 웃기만 했지만, 오랫동안 그 충고를 기억하겠노라 전했다.
세율부의 밝은 춤꾼은 정한에게 선뜻 다가와, 반가운 주제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한은 그와 얘기하며, 과거의 그립던 기억을 떠올렸다. 손님에게 받았던 드라이기는 그렇게 추억을 떠올리는 매개체로 새로이 자리매김되었다.
어떤 세율부의 이는 정한의 사소한 장난기를 일깨웠다. 요리로 허튼짓 하던 정한에게 감히 타로 밀크티 죽을 만들게 한 그는, 단언컨대 정한을 가장 즐겁게 했으리라.
세율부에서 절대 길 헤매지 않을 이를 꼽자면, 정한은 그를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겠다 말한, 정한의 길잡이 별. 그래서 불안할 때는 곧잘 그를 보았다. 망설이게 되는 상황에서도 그가 떠올랐다. 허울뿐인 사람이 아닌, '어른'이 된다면. 자신은 그를 롤모델로 삼고 싶었다.
이렇게 즐거운 기억만 있는가 하면, 어떤 세율부의 이는 정한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의 안경 너머, 초췌한 낯에 무엇을 비추는지. 정한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정한은 그가 절대 악어새 ... 가 아닐 거란 생각을 종종 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작은 세율부의 이는 귀여웠지만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정한은 유독 다리 많은 것을 싫어하는데, 그는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 하여 경악케 한 적이 있었다. 귀여운 그를 보며, 정한은 종종 ... 억지미소가 아닌 진심이 우러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옆에 있으면 시시콜콜한 얘기를 할 수 있어 즐거웠다.
다정한 세율부의 이는 언제나 포근했다. 하루 이틀 보지 않더라도, 어색함 없이 밝은 미소로 안부를 전하며 내일을 이야기할 것 같았다. 그 친절함에 정한은 언제나 작은 두려움을 누를 수 있었다. 그를 보고 있자면, 본가 생각도 나는지라. 어머니가 보고 싶은 건 또 별개의 일이었지만.
정한은 그가 가장 궁금했다. 세율부의 많은 이와 대화하면서 느껴본 적 없는, 이 울렁거림을.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이 서늘함의 이름을 그는 알고 있을까. 너무 차가운 것을 만지면, 불에 댄 듯 타들어가는 느낌이 난다. 정한은 그와의 대화를 이어 나갈 때마다 불에 탄 듯, 가슴이 답답했다.
세율부의 자애로운 이는, 종종 미소 너머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호할 땐 단호하고, 너그러울 땐 너그러웠다. 청결에 신경 쓰는 그는 적어도 정한에겐 너그러웠다. 하지만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진심은 무엇일까. 많은 얘기를 했지만, 정작 그에 대한 건 늘 한 조각 씩 피스가 빠져 있었다.
째릿. 정한은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 한다면 '째릿 고양이'로 정의할 것이다. 말 그대로 … 째릿한, 어쩌면 귀여운 낭만 고양이. 하지만 친절한 그는, 아직 세상을 배우는 중이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그가 어떻게 성장할지. 정한으로서도 궁금했다.
정한은 그의 모자를 뒤집어썼을 때가 떠올랐다. 딱딱한 모자. 전혀 편하지 않은 그 모자를 뒤집어쓰고, 매일을 일 하는 그는 정말이지 부지런하구나. 정한은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 부러웠다. 그는 자신의 일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고 버틸 줄 알았으니까. 정한에겐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를 떠올리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기한 사람. 정한은 그를 위해 여러 종이접기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었고, 동시에 축하받아 마땅했다. 물론 그의 경우엔 다소 … 과장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정한은 유독 그를 보면 몸이 굳었다. 자신이 잘하면 될 문제인데, 그런데도 몸이 굳었다. 혹시나 말실수를 하지 않을까. 그가 목도리를 단단히 여밀 때, 정한은 자신의 마음을 굳건히 여맸다. 네 곁에 있으면, 묻어둔 후회를 마주하는 기분이라. 정한은 그를 대할 때 보통의 사람과 달리 더 여러 번, 생각을 정리했다.
… 정한은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선글라스 기자양반. 자신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선글라스를 끼는 그를 보며, 정한은 신묘함을 느꼈다. 이런 타입의 사람은 정말이지 드문데. 제 입담이 말리는 상대는 또 오랜만이라, 정한은 그를 보며 웃을 때 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정한은 집안의 막내라, 늘 동생이 있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했었다. 그리고 세율부에 와서, 그를 보고 '어머 귀여워라'란 생각을 했다. 동생이 있다면, 그렇다면 꼭 당신 같을까. 자신을 지켜주던 모습은 또 얼마나 든든한 지. 함께했던 시간 동안, 정한은 그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앞으로의 시간에, 자신이 그를 지킬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좋을 텐데.
정한은 그를 보고 도망쳤다. 언제나 올곧고 솔직한 그를 보면, 정한은 속이 뒤집혔다. 알아, 이게 무슨 기분인지. 알고 있어, 이게 어떤 감정인지. 정한은 그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그가 원하건 원치않건, 그냥 보였다. 그를 떠나, 한참을 달릴 때 정한이 생각한 건 한 가지 였다. 당신과 친구가 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이건 분명 그의 탓이 아닌, 정한의 탓이 크다고. 정한은 올려다 본 하늘에 구름이 가득한 것 마저 억울했다. 차라리 하늘 가득 별이라도 떠있다면 외롭진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소리죽여 울지 않을텐데. 정한은 멈춰선 자리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바꾸지 못할 과거를 마주하는 기분이란 …
정한은 그를 좋아했다. 그의 팬이었고, 그와 함께 일하게 된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정한은 그의 팬으로서 하고 싶었던 위시리스트도 달성했다. 그의 곁에서, 정한은 성공한 덕후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감정이었고, 세율부의 일을 하면서도 든든했다. 정한은 그가 가진 고유한 카리스마를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함께하는 동안, 정한은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일방적인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 원래 마음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세율부에서 유독 신경 쓰이는 사람. 정한은 그와 내기를 했다. 자신이 이곳에 와 변한 것처럼, 그도 변할 거라고. 정한은 그리 믿었다. 자신만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곳엔 좋은 사람이 많은 걸. 그러니 '너'도 변할 수 있을거야. 문 너머로 발 딛고, 나아갈 수 있을거야. 정한은 그에게 늘 그리 말해주고 싶었다.
정한은 그를 보면 … 조금 의아했다. 많은 대화를 하면서도, 무슨 생각하는지 오묘했다.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인지 의아했다. 제게 무엇을 기대하는 지도 잘 모르겠다고, 정한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대화하면 정한은 우주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소리치면, 어디선가 되돌아왔지만 무언가 허전했다. 그렇다고 너무 고요하진 또 않고. 정한은 그래서 그를 볼 때마다 뭐라도 하나 더 얹어주었다. 말이라면 말, 물건이라면 물건. 뭐라도 좋으니 땅에 발 잘 디뎌서 서 있길 바랐다. 자신은 몹쓸 이데아를 말했지만, 아직 네게 말해주지 못한 게 있었다.
세율부에서 신뢰가는 이를 뽑으라 한다면 정한은 그를 떠올렸다. 가장 이성적이고 어쩌면? 세율부의 귀한 정상인이었다. 그와 대화하면 정한은 즐거웠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대화를 하며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었다. '너'와의 대화는 정한 염원에 물을 뿌렸다. 잊고 있지 않았냐고 묻듯이 말이다.
정한은 그와 있으면 편안했다. 일상적인 대화, 그 너머로 오고 가는 주제가 즐거웠다. 편안하면서도 즐거운 대화를 나눈,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한 명. 정한은 그가 멋진 히어로가 되길 바랐다. 딸을 위하는 그가, 후회 없는 삶을 살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고, 나아감에 있어 당당하기를. 원래 부모란 그런 법이니까.
세율부의 기만자,라고 정한은 생각했다. 그는 보고 있으면 답답했다. 적어도 정한에게는 그랬다. 서로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하면서도 각자가 가진 고유의 고집은 꼭 끌어안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는 자신이 좀 더 고집을 부리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정한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 여러번 고민하게 됐다. 네게 돌아가라 종용하면서, 내심 자신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싶어했다. 네게 하던 말은 … 사실상 정한, 본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걸.
그를 보면 정한은 바람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무얼 하건, 무슨 얘길 하건. 정한은 그와 대화하면 적당히 밀고 당기는 게 좋았다. 딱 적당한 선을 그어서, 그 이상 넘어오지 않았다. 물론 자신도 그 선 이상으로 집요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까. 정한은 그와 대화하면 오랜만에 동종업계의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편안했다. 쓸데없는 사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더라도, 넌 이해해주니까.
정한은 그를 보며 소리 없는 울음을 삼켰다. 바다에 빠져 익사해버린 두더지는, 이미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그런데도 너는 제게 끊임없이 손을 내밀었다. 네가 두드리는 말은 따스하고, 자신이 정말 듣고 싶어 했던 말이라서. 그래서 더 속이 타들어갔다. 정한은 그를 보며 늘 생각없는 말만 하고 싶었다. 그저 허울뿐인 미소를 짓고, 가죽뿐인 관계의 탈을 뒤집어 쓰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 말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질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 증거로 이미 드러나지 않았던가. 웃음 너머, 그 건조하기 짝이없는 바다에서. 별 한점 비치지 않아 시꺼먼 바다에서, 넌 무엇을 보았나.
이렇듯, 정한은 많은 이를 만나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때때로 정한의 염원에 물을 주기도, 햇빛을 비춰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정한이 과욕 하나를 가지게 된다면 그건 분명 … 당신들이 앞으로도 계속 제 곁에 머물러주길 바란다는 점이다. 오늘의 별이 지고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때. 정한은 다시금 당신의 앞에 나타나, 웃으며 말을 걸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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