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말하기 부끄러워, 오랜 시간 웃고만 있었다. 미소와 친절 그리고 인내하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라 믿었던 이안은 처음 발 딛게될 학교를 올려다 보았다. 여기선 어떤 친구를 사귀게 될까? 평생 호숫가로 산책가서 떠들며 화관을 만들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새로운 현실 앞에서 이안은 버릇처럼 엉뚱한 사고를 하고 마는 자신이 퍽 우스웠다.
Chapter1
영국 마법학교, 호그와트 입학. 이안 라모트는 종종 생각 날 때마다 적던 노트 하나를 꺼냈다. 잘 챙겨다니거나 꼼꼼히 기록하던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노트의 역할은 생각나는 리본 공예 디자인을 그리기 위해 갖고 다녔던 것이었다. 하지만 호그와트 입학 이후 노트에는 다른 것도 적혔다.
“아니 … 내가 이런 것도 적었나? 언제 적었지?”
이안은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 1학년 때를 떠올렸다. 직전 졸업식을 마쳤으나 7학년을 제외한 학생은 안전상의 이유로 이미 귀가한 지 오래였다. 이안 또한 짐 정리의 마무리를 위해 기숙사 정리를 했는데 노트는 그 과정에서 튀어나왔다. 4학년 때 의상 스케치를 위해 마련한 노트와는 별개의 것으로 1학년 때 쓰던 것이었다. 이안은 집에 두고 온 줄 알았던 노트가 침대 틈에 끼어 있었단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초반 몇 장엔 간단히 그려진 리본 디자인이 보였으나 더 넘기면 글이 빼곡했다.
친구들의 첫인상 *이안 라모트 외 열람금지!
알렉스 : 옷차림이 엄청 단정하고 깔끔하지만 성격이 … 장난치기 좋아할 것 같다. 엄마가 그랬는데 한 쪽 귀에 피어싱이 두 개면 말 걸지 말라고 했는데 요주의 인물. 아까 말하는 걸 들었는데 원래 저런 말투…인걸까 아니면 긴장한걸까?
엔야 : 한 고집하게 생겼다. 머리카락이 엉망인데 빗겨주겠다고 하면 사이 안 좋아질 것 같으니까 참아야지. 사고 많이 칠 것 같지만, 나쁜 친구 같진 않다. 후플푸프에 배정되면 매일 주방으로 달려갈 것 같은 느낌!
헤일리 : 반짝거리는 친구, 헤어 스타일은 본인이 직접 하는 건가? 리본으로 묶어도 좋을 것 같아서 말 걸어 보고 싶은데… 어느 기숙사에 들어갈까? 같은 기숙사면 좋을 것 같은데.
아이작 : … 엄마가 보고 싶은 걸까. 아까 옆을 지나쳐 갔는데 엄마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얼굴에 반창고도 많고, 조금 위험해 보이는 친구인데 전직 골목대장인걸까? 웃는 모습을 못봐서 궁금해지는데 간지럼 타려나.
레오 : 베들링턴 테리어를 닮았는데 이거 말하면 본인에게 큰 실례겠지? 혼자만 알아둬야지… 아마 그리핀도르 기숙사에 배정될 것 같은 친구. 교복이 엄청 큰 편인데 안 넘어지려나….
루크 : 여기저기 돌아다니던데 탐험이 취미일 것 같은 친구. 하지만 활발해보이니까 나랑 있으면 심심해할 것 같기도 하고… 밝은 얼굴이 인상적이다.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좋은 친구가 되면 좋겠는데….
니나 : … 어째서일까, 말 걸면 혼날 것 같아서 먼발치에서 보고 볼만 긁적였다…! 자세가 엄청 반듯해서 보기만 해도 긴장이 되는데, 운동을 하는 친구일까? 언제 말 걸지 고민이 된다.
실리안 : 눈빛만 봤는데 공허해서 내가 뭘 잘못 했나 성찰하고 왔다. 교복을 엄청 정갈하게 입었는데 꼼꼼한 친구인 것 같다! 리본 같은 거 좋아하려나….
레녹스 : 머리 위에 … 쥐?를 올려둔 건가? 머리카락이 복실해 보이는데 기회가 된다면 꼭 만져봐도 되는지 물어봐야지. 그리고 아까 지나쳤을 때 약초 냄새가 났는데… 잘하면 부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칼렛 : 빨간색 곱슬 머리를 리본으로 잘 묶어서 시선이 갔다. 리본은 본인이 직접 묶는 걸까? 흰색 리본도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 다음에 마주치면 말 걸어 봐야지.
시몬 : 맙소사, 넥타이를 저렇게 풀어헤치고 다니면 교수님께 소리 들을 것 같은데…. 묶을 줄 몰라서 풀고 있는 건지 답답해서 풀고 있는 건지 궁금한데 물어봐도 되려나?
쉴라 : 멍…해 보이는데 피곤한 걸까? 양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에 리본 달아주고 싶은데 친해지면 꼭 얘기해봐야겠다. 지금은 피곤해보이니까… 말 거는 건 다음으로 기약해야 겠다.
클로드 : 옷은 다 갖춰 입었는데 왜 셔츠 끝자락이 튀어나왔는지 모를 친구. 넣으라고 하면 ‘네가 내 엄마냐?’라고 할 것 같아서 뒷통수만 지긋이 봤다. 어느 기숙사에 배정될까? 엄마한테 들었는데 이런 친구들이 꼭 슬리데린에 간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에블린 : 헤어 브릿지가 유독 눈에 들어오는 친구. 얼굴 빛도 좋고 밝아 보여서 여러모로 가까이하고 싶은 친구지만 내가 붙어있으면 아마 실시간으로 … 엄마가 뭐라고 하셨더라. ‘이안 너는 외향적인 친구들이랑 있으면 분명 디멘터의 키스를 받은 것처럼 힘이 빠질 것 같네. 모쪼록 잘 챙겨먹고 친구를 많이 만들어서 극복해보렴!’라고 하셨는데 … 디멘터가 뭐지, 에블린이란 친구는 알려나.
폴 : 이 친구는 어쩌다 맨발이 되었을까. 사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잘 모르겠다. 양말도 안 신었단 점에서 발바닥은 괜찮나 싶지만 … 이게 말로만 전해듣던 자유를 지향하는 사람인건가 싶다. 말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걸어 보는 걸로. 일단 보류!
루카스 : …? 명상하는 건가, 특이한 자세… 특이한 헤어스타일 … 그리고 특이한 끈인데 어떤 유행인걸까? 저걸로 리본 묶으면 엄청 크게 묶일 것 같은데.
루시아 : 푸른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친구. … 웃는 낯이 너무 익숙해서 사실 껄끄럽지만 엄마가 고루 이야기 하라고 하셨으니 조심해야지. 지나쳤을 때 향이 인상 깊었다.
발레리 : 빨간색 리본, 매듭이 깔끔해서 기억에 남는 친구. 공부를 잘할 것처럼 생긴 친구인데 보자마자 아빠가 생각났다. 기숙사는 래번클로에 갈 것 같은 친구인데 아니라면 나의 편향적인 사고관에 대해 성찰 해야할 것 같다.
재커라이어 : 머리카락이 복슬거리는 거랑 별개로 조금 불편해보이는 친구. 머리카락을 묶은 생각은 없는 걸까 싶어서 뒷통수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묵주를 손에 말고 다니던데 친하게 지내야지. 원래 이런 친구가 화나면 손에 묵주를 감고 때린다고 엄마가 그랬으니까.
아서 : 뚜렷한 이목구비의 친구라서 보자마자 얼굴을 외웠다. 이름이 아서라고 하던데 친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을텐데. 손에 상처가 자잘하게 나서 신경 쓰였는데 고양이를 보고 납득이 갔다. 고양이의 이름은 뭘까? 엄청 작아… 사실 햄스터가 아닐까.
디미트리오스 : 이름이 엄청 길어서 외우는데 애를 썼는데, 막상 외우고 나니 ‘미미’라고 불러달란 말을 들었다. 빨간 머리가 인상적인데 인상도 엄청 활발하고 (작은 글씨로) 사고를 잘 칠 것 같다. 친하게 지내면 함께 혼날 것 같으니까 적당히 인사를 건네 봐야지. 근데 미미라는 이름은 너무 귀여운 이름이라 괜찮나 이렇게 불러도?
헤레이스 : 머리카락이 엄청 복실복실해 보이는 친구. 전체적으로 덥수룩한 인상인데 옷도 엄청 크고… 나중에 엄~청 클 예정인건가 싶어서 빤히 보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아빠한테 교복을 크게 맞춰달라고 할 걸…. 엄청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데 호그와트에 적응하고 나면 꼭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같은 기숙사면 좋을텐데!
켄드릭 : 종… 잡을 수 없는 친구. 열차를 타기 전에 캐리어를 잔뜩 쌓아두곤 숨어있던 모습을 봤다.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친구인걸까? 옷은 빳빳하고 단정해서 그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흠 잡을 구석 없는 모범생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숨바꼭질이 좋다면 나중에 애들 모아서 하자고 할까. 유치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이건 기각!
리암 : 엄청 느긋해보이는 인상의 친구인데… 짓궃을 것 같아보여서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다. 어깨를 앞으로 숙이고 있던데 그러면 근육통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니나란 친구가 보면 어깨 펴!라고 할 것 같은데…. 어느 기숙사에 배정될 지 모르겠지만 그리핀도르나 래번클로면 좋겠다. 계단을 자주 오르내리다보면 어깨가 펴질 것 같으니까!
세이지 : 엄청나게 꼼꼼한 옷차림에 깜짝놀랐고 긴 머리카락을 촘촘히 땋아서 두 번 놀란 친구! 끝에 리본으로 묶어도 좋을텐데, 저 긴 머리카락은 직접 땋은 걸까? 대단한 인내심의 소유자란 생각에 힐끔힐끔 보고 말았다. 공부 잘할 것 같은 친구인데 … 저런 친구도 나중에 낙제라는 걸 경험하게 될까?
이본 : 반짝거리는 친구. 머리카락은 예쁜 흰색 리본으로 묶었단 점에서 센스가 탁월해보인다. 말하는 태도, 생각하는 방향에서 엄청난 자신감이 느껴지는데 넥타이가 살짝 삐뚤어져 있어서 그게 조금 신경쓰인다. 이 친구는 어느 기숙사로 배정될까? 엄마가 자신감 넘치는 사람은 그리핀도르라고 하셨었는데 … 그리핀도르에 배정되려나?
읽다 보니 민망함이 차올라서 노트를 덮었다. 맞는 내용도 있었지만, 완전히 틀린 내용도 많았다. 그리고 이제는 ….
Chapter2
호그와트졸업 이후 이안의 삶은 공부와 공부와 공부의 연속이었다. 공부가 무려 세 번이나 서술되었을 만큼 이안은 이제 책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의상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기본적인 머글 사회의 학문은 수료해야 했기에 교사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다소 긴 시간을 학문에 정진해야만 했다. 그래서 때때로 이안은 생각했다. 차라리 호그와트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빨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꿈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시간은 호그와트를 다녔던 7년만큼이나 쏜살같이 흘렀다. 2년의 시간 동안 기본 학문과 패션 스쿨 진학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준비한 이안은 한 톨의 미련도 없이 영국을 떠났다. 나고 자란 윈체스터에서 떠나 해외로 떠나는 길에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졸업 직전의 ‘사건’ 탓에 이안은 이보다 빨리 영국이란 나라를 떠나고 싶어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녀오겠다는 말 대신 안녕이란 작별의 말을 부모에게 남긴 채 이안은 홀로 프랑스의 파리로 떠났다. 졸업 직후 부모님께 ‘그’가 돌아왔으니 해외 이민을 가자 졸랐던 이안이었다. 처음엔 이안의 제안을 진중히 고민했던 부모님은 끝내 이민을 택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윈체스터에 남길 선택한 부모님은 이안의 걱정 일부를 받아들여 시내로 이사를 감행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머글의 틈에 섞여 있다면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한 몫 했다. 결국, 머글 사회의 보잘것없는 ‘라모트’ 일은 변하지 않았다. 부모는 여전히 윈체스터에, 이안은 도주에 가까운 유학을 떠났다. 그 과정에서 발푸르기스 기사단의 입단을 거부했고 마법사 사회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안은 이번에도 선택을 미루었고, 유학이란 제3의 길로 도망친 셈이었다.
프랑스에서의 삶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호그와트 1학년 때와 달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컸다. 혼자 살기엔 널널한 방에서 딱딱하지 않은 빵을 삼키며 원하는 걸 할 수 있었다. 손 닿는 곳마다 이안이 낙서한 의상 스케치가 널브러져 있었고 벽에는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안은 옷 외에도 가방이나 구두, 다양한 것을 디자인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누군가 이것을 본다면 ‘방관자’였던 이안이 죗값을 치르지 않고 행복해한다며 삿대질할 정도로.
이안은 그런 행복한 나날을 보낼 때면 꼭 악몽을 꾸었다. 호그와트를 졸업하기 전 무수히 많은 악담을 들었는데, 이안의 악몽을 주로 그 악담의 되풀이였다.
“넌 언젠가 후회할 거야.”
“이안 라모트, 거짓말쟁이로 살 거면, 끝까지 그렇게 살아.”
“상처 주기도 싫어서 애매하게 버티다가 파고 들어가서야 토로하는 꼴이라니. 넌 진짜 나쁜 놈이야. 알아?”
“네 위선의 책임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지 마, 비겁해보이니까.”
“후배들에게 가서 물어봐. ' 방관자 주제에, 선배 노릇 한다. ' 이런 말이 들릴지도 모르지.”
“당신이 방관할 거라면, 더는 신경 쓰지 말아야죠.”
악몽을 꾼 날에는 더 활짝 웃었다. 평소에도 방긋 웃는 낯으로 잘 돌아다녔던 이안이지만 이 경우엔 조금 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활짝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누가 잘못 날린 공에 맞거나 계단에서 인파에 밀려도 화는커녕 오히려 평소보다 더 밝은 낯으로 상대를 걱정했다. 마치 악몽 따위 꾼 적 없노라고. 큰 빛은 주변도 다 밝힐 수 있다는 듯이. 물론 이안은 큰 빛에는 큰 그림자 또한 함께한다는 과학적 사실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악몽이 말했던 대로 끝이 오고야 만다. 사실 이안은 호그와트 친구들이 데리고 다니는 반려동물이 늘 부러웠다. 아서의 키티나 스칼렛의 컵, 발레리의 슈, 그리고 레녹스가 아끼던 형제 레미처럼 말이다. 그래서 졸업 직후 곧장 올빼미를 들였는데 다이아몬드에서 ‘몬드’를 가져와 이름 붙였다. 해외까지 열심히 비행하는 올빼미는 이안의 연락을 대부분 전담하였는데 행복의 ‘끝’ 또한 몬드가 전해주었다. 소식이란 이름의 행복을 전해주었던 것처럼, 사건이란 이름의 불운 또한.
Chapter3
이안은 패션스쿨을 졸업한 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의상 공부를 했었다. 주로 지낸 곳은 파리였으나 밀라노, 그리고 아주 가끔 런던에 들렀다. 공부의 끝은 취업으로 이어졌는데 프랑스의 의상 회사에 소속되어 디자이너로 활동하게 되었다. 마침내 이안은 본인이 ‘꿈’을 이루었다 자부했다. 물론 보이지 시력 탓에 때때로 곤란을 겪기도 했으나 이때만큼은 다시 ‘마법’의 힘을 빌렸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행복의 도중, 몬드가 편지를 물고 왔다.
회사엔 휴직계를 냈다. 지내던 집은 처분하지 않고 다소 오래 비울 것이라며 관리할 사람을 찾아 고용했고 급히 영국으로 향했다. 서둘러 향한 탓에 이안이 들고 있는 짐이라곤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 삐딱한 코트의 카라와 순서를 제대로 꿰매지 않은 셔츠차림으로 이안은 윈체스터의 한 병원 앞에 섰다. 연락은 아버지로부터 왔다. 정갈하고 수려한 글씨체를 가진 아버지는 종종 이안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필기체를 이용해 편지를 보낼 정도로 글씨가 정갈했다. 하지만 이안이 받은 편지는 달랐다. 삐뚤삐뚤한 글씨는 방금 펜을 쥔 사람이 떨리는 손으로 한 글자씩 눌러서 쓴 것이었다. 얼마나 힘을 주어 쓴 것인지, 편지를 맨 손으로 쓸어보면 울퉁불퉁한 감촉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 이렇게 두 가지가 이안을 이런 몰골로 꺼리던 영국을 향하게 했다. 패션 위크로 참석한 런던 일정조차 당일치기 했던 이안이었다.
"저 연락을 받고 왔는데요. 네, ■■호실 환자 가족입니다."
데스크를 지나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걸었다. 호실 번호가 맞는지 겨우 체크한 뒤 땀이 묻어나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조용한 병실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아버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 물었다.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거냐고… 그리고 끝으로 괜찮냐고.
아버지가 답 없이 손 뻗는 것을 보았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너무 평온해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단 점이었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창밖의 빗소리만 투두둑 울렸다. 영국의 비는 수없이 내렸고 질리도록 보고 들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섬뜩하고 기분 나빴던 적이 있었던가.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가 입을 무거운 침묵을 깼다. 강제적인 인원 차출, 강압적인 토벌 작전 이를 거부한 사람의 결말이었다. 아버지가 화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어머니가 집 옆 공방에 홀로 있을 때, 아버지는 머글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으니까. 어머니는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고 했다. 아버지 본인이 가진 마법 사회의 지식으로도 짐작 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라곤 마법 사회의 병원에 가야하는데 이 시기에 처벌 받은 이를 받아줄 리 만무했다.
유학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부모님을 뵙지 않았다. 런던에 온 적이 있긴 했으나 바로 옆 동네인 윈체스터엔 들리지도 않았다. 부모님을 마주한 것은 유학 이후 처음이었는데 아버지의 걱정 가득한 표정이 낯설었다. 당당한 미소가 어울리던, 자신에게 어떤 장난을 칠 지 짓궂은 미소를 짓던 아버지의 낯이 두려워서 잠시 시간이 필요하다며 병원 밖으로 도망쳤다.
어머니를 그리 만든 집단은 자신 때문에 일어섰다고.
당신이 이토록 고통받게 된 이유는 자신이 행한 일의 영향이라고.
무지라는 이름으로 죄를 지었으나 다른 친구들 또한 공범자가 되었음에 기뻐서 비밀로 했노라고.
차마 말할 수 없어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외면과 방관 그리고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라 믿었던 이안은 다시금 도망갈 구석이 필요했다. 이번엔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언제까지 도망가야 하는 걸까. 현실을 마주했음에도 이안은 버릇처럼 이기적인 사고를 하고 마는 자신이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