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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 | 확신

주화입마 금치 2021. 6. 3. 05:39

 

Aimer - ポラリス / HANPPYEOM

 


  카노는 가끔 상상해보고는 한다. 자신이 편리함에 취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서지 않았더라면—같은 상상. 그랬더라면 조급하고 두려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지팡이를 들고 자리했을 것이다. 친구를 죽이는 것에 죄책감 한 조각 가지지 않았을지 모르고, 어쩌면 이리 웃으며 옛 추억 하나 꺼내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삶임에도, 자신의 것이라는 체감이 들지 않아 무뎌졌을 또 하나의 가능성. 이제와서는 가정에 불과한 길이지만, 그럼에도 상상하고 나면 제법 뒷맛이 텁텁했다. 마치 썩은 오렌지를 베어 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상상도 결국 덧없는 것이다. 카노는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전쟁이라는 큰 불행 중 다행인 것을 하나 꼽으라 한다면, 이 기사단에 아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전혀 모르는 이들이 아닌, 제 삶의 일부를 함께한 이들이기에 상상은 곧 공기가 되어 흩어졌다. 자신이 서 있는 지면을 굳게 디뎠다. —나는 여기에 있어. 다른 곳이 아니야, 지금 이 자리에 있어.—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지금은 사무엘의 앞에 있었다. 그래, 나는 너의 앞에 있어. 너와 같은 곳을 걸어가기 위해서.

 

  " 그러게, 나는 사실... 노심초사했거든? 엘이 저쪽에 있으면 어떡하나, 뭐 그런 생각. 물론, 엘이 그런 관상이라는 건 아니고 그동안 우리가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었잖아. 그만큼... 생각하는 것들이 달라졌을까 싶었거든. "

 

  막상 함께 싸우게 되니, 그건 그것대로 마냥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카노는 자신이 딛고 선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전쟁터, 오늘 살아있는 이가 내일은 죽을지도 모르는 곳이다. 미래를 장담하며 옛 추억을 논하기엔, 비명과 규환이 더 어울리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너와 이곳에서 재회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한다면, 너는 어떤 답을 줄까. 내일 눈 감을지 모르는 이 전쟁터에서 네 모습을 보고 반가웠노라, 그리 생각했다. 카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긋지긋한 집에서 지냈지만, 한 가지 잘 배운 것이 있다면 '입'을 가벼이 놀리지 말라는 가정교육 일 것이다.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를 구분하여 말을 고르는 것은 집을 떠난 지 한참이 된 지금도 여전했다. 언제 입을 다물고 있었냐는 듯, 입가를 올렸다. 미소 짓는 것은 지난 세월 배운 것 중 가장 쉬운 것이었다.

 

  " 그래도 돌아왔으니까 봐줄게. 봐준다는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 난 그걸로 만족할 줄 아니까. 그리고 나도 무사히 돌아왔고 말이야. 내가 그랬잖아,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

 

  어쩌면 자만 가득했던 그 발언을 지켰다고. 카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확신에 가득 찬 문장을 뱉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아직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자신은 최선을 다해 살 생각이었다. 전쟁을 떠나, 그저 사람이기에.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과 승부의 결과가 중요했다. 쉽사리 포기하고 목숨을 내어줄 생각은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확신한 대로 무사히 싸움을 마쳤다. 약속한 것이 많았고, 눈을 감기엔 아직 해야 할 것들이 많았으니까.

 

  카노는 사무엘이 처음 전투에 나갔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도 오늘과 같이 첨예한 바람이 불었다. 그때의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무력한 기도뿐이었다. 너도 오늘은 그런 기분을 느꼈던 걸까. 카노는 손 끝으로 소매를 주물렀다. 불안하고, 마냥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 손이 얕게 떨렸다. 내일을 넘어, 전쟁의 종착점에 네가 서있을까. 너는 살아있을까. 카노는 일그러질 것 같은 표정을 애써 삼켰다. 오늘은 자신의 차례가 지났으니, 다음 차례가 불 보듯 뻔했기에 속이 울렁거렸다.

 

  " 아무래도 그런 류의 소설이니까. 짧은 기승전결 구조로 독자에게 확실한 재미를 주겠다!라는 의도가 명확해 보였어. 종종 권선징악적인 측면을 보여주면서 독자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부분도 있었고. 난 딱히 즐겨 읽지는 않았지만 … 흥미는 있었지? 응, 운명적인 사랑 같은 거. 정말로 존재한다면 역시 … 사랑의 불합리함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궁금하거든. 엘은 생각해본 적 있어? 이득과 이익, 이기를 넘어 그 불합리함을 선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야. "

 

  이상한 구석에서 래번클로적인 측면을 보이는 카노는,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에게 늘 의문을 가졌다. 사랑에는 늘 시련이 따르고, 불공평한 대우와 오해 및 온갖 방해물이 주인공을 맞이한다. 주인공은 시련에 넘어지고 울며 괴로워하지만 사랑을 놓지 않는다. 대부분의 로맨스 소설의 끝은 그런 주인공이 자신의 연인과 행복해지며 '오랫동안 함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카노는 503호의 부인을 떠올렸다.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쓸어 넘기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무엘에게는 전해주지 못한 편지의 뒷 내용이 있었다. 503호의 부인은 호텔의 식당으로 내려와 식사를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오직 503호실 안에서 해결했다. 그렇기에 503호실에는 늘 주방에서 트레이를 보내야 했는데, 여인의 식사는 늘 2명 몫이었다. 카노는 그때서야 부인이 남편을 애증 하고 있기보다는 그저 오랫동안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저 503호실의 부인은 남편의 기억에 발 딛고 서있음을, 카노는 뒤늦게 이해하였다.

 

  그러니 답하고 마는 것이다. 

 

  " 있잖아, 그렇게까지 말해 주었는데도 나는 아마 … 너를 잊지 못할 것 같아. 네가 죽어도 계속 기억하고, 추억할 것 같거든. "

 

  나는 너를 영원히 기억하겠노라고.

 

  카노는 몰아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 추운 날 너와 함께 대화하며 보낸 시간을 짚어보았다. 더 뒤로 간다면, 함께 기숙사 휴게실에서 이야기하며 보낸 시간을 짚었다. 늦은 밤, 너와 함께 이야기하며 보낸 시간을 지금도 추억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시간도 많은 어둠을 넘기고 난 뒤엔 추억이 될 터였다. 그렇기에 카노, 자신은 잊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밤하늘에 떠오른 무수한 별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죽는다면, 이 무수한 별들 중에 하나가 될까. 그렇다면 찾아서 추억할 생각이었다.

 

  날이 추워, 얼마나 더 많은 어둠이 지나야 봄이 올 지 감 조차 잡히지 않았다. 카노는 품에 안은 온기가 봄이길 바랬다. 이게 봄이 라면, 앞으로의 걱정이 눈처럼 녹을 텐데.

 

 

 

" 나도 다녀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