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도시2]드림성식2
동인판의 인권유린상자에 아저씨 담아드림
조금의 틈도 없이 뒤엉킨 채로 캐비닛에 갇힌 지 벌써 10분이 넘었다. K가 욕을 구시렁대기 바쁜 김성식을 빤히 쳐다봤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것도 상대방이 전혀 자신을 신경쓰지 않고 작금의 상황에 짜증만 내고 있다면 더욱. 서로가 움직이려하면 할수록 옥죄는 자세탓에 둘은 결국 얌전히 서로를 옭아매는 형태를 유지한 채 더 꿈틀거리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어제의 제보 때문이었다. 익명의 제보는 은밀하진 않아도 보통의 사람이 알 수 없는 선진화파의 김성식 사무실 책상 위에 작은 쪽지를 남겨두었다. 김성식은 이를 두고 또 선진화파 내부에 쥐새끼가 숨어들었다고 길길이 날뛰다가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며 쪽지를 확인했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 장희준 회장은 소매상에 불과했던 백석상회를 그룹으로 키웠다. 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은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 그리고 지금 당신의 손에 있는 가장 큰 돈줄을 회장이 탐내지 않을 이유가 있는지 잘 생각해. ]
덕분에 집에서 짜장면을 비벼먹고 있던 K는 김성식의 다급한 호출에 짜장면 플라스틱 그릇을 통째로 들고 택시를 타야 했다.
"이 미친 녀석이 또 지랄을 이렇게 해?"
상황이 상황이었던 터라 김성식은 플라스틱 그릇을 통째로 가져와 짜장면을 비벼먹는 K를 향해 신랄한 욕을 던졌다. 물론 그에 기죽어 관 둘 또라이가 아니었기에 K는 그 잔소리를 단무지 대신으로 삼아 아삭아삭 씹어먹었다.
"전생에 거지로 굶어죽은 것도 아니고 말이지. 마주칠 때마다 뭘 먹고 있더니 긴급하단 연락에도 먹을 걸 챙겨와?"
하지만 곧 그 불평불만은 다른 주제로 전환되었다. 김성식이 짜장면을 우왁스럽게 먹고있는 K를 소파에 앉힌 뒤 쪽지를 건넸다.
"네 녀석을 노린다는 쪽지가 이 김성식의 책상 위에 다이렉트로 전달이 됐어."
"호로롭"
"장희준 회장을 아나? 백석 그룹의 늙은 능구렁이 같은 작자지, 작은 상회를 기업으로 만든 작자니까 말이지."
"호롭"
"그는 나와는 비슷한 듯 다른 부류지, 나의 경우엔 상벌이 확실하고 패를 버리지 않지만 그 구렁이는 얼마든 손바닥 뒤집듯 사람을 패로 쥐고 버리거든."
"호로로로롭"
"그만 먹어, 이 개나리 자식아!"
참다못한 김성식이 K가 짜장면 그릇에 얼굴을 박으려던 찰나에 손을 뻗었다. 맑고 청아한 플라스틱 그릇의 소리가 딱딱한 시멘트 벽에 부딪혀 뎅~그랑 하고 울렸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부하 몇이 화들짝 놀라서 들어왔으나 주변의 상황을 보곤 조용히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이런 경우는 흔했다. 또라이 K의 행동에 김성식이 짜증을 내고 다시 조용해졌다가 K가 또라이 짓을 반복해서 김성식이 ... ... 아무튼 이런 상황은 이미 조직 내부에선 흔한 일이었다. 물론 김성식이 이런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 먹는 사람은 개도 안 건드린다는 한국 속담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저씨는 왜 그래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저 배고프다고요."
K의 태평한 소리에 김성식이 제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쳤다. 이 자식 때문에 그간 김성식은 저혈압이라 생각했던 본인의 혈압이 드디어 정상을 찾다못해 고혈압이 되진 않았나 걱정할 정도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뒷목에 몰리는 피를 어찌 설명할까. K의 뻔뻔한 얼굴은 여전히 기이할 정도로 잘생겼다. 싹수가 노란 꼬맹이는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에선 반반하게 생겨서 썩 봐줄만한 외형이었다. 물론 저 입가에 검은 짜장 소스가 범벅이지 않다면 말이다. 얼마나 정신없이 먹었는지 입가는 무슨, 콧대에서 소스가 묻어있었다. 김성식은 음식을 먹을 때 소리를 내는 사람, 음식물을 튀기는 사람 그리고 음식물이 입가에 지저분하게 묻은 사람을 가장 싫어했는데 지금 이 꼬맹이가 이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
짜증난 표정과 함께 거친 손길로 물티슈를 여러장 뽑은 김성식이 던지다시피 K에게 던졌다.
"아, 마침 필요했는데 고마워요 아저씨"
하지만 이를 어찌 받아들였는지 K는 입가가 아니라 애꿎은 손을 닦았다. 김성식의 이마에 핏대가 하나 솟았다.
"입, 입, 입을 닦으라고 이 자식아!"
또 우렁차게 사무실을 채우는 김성식의 고함 소리가 울러퍼졌다. 밖에서 문을 지키던 조직원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근데요 아저씨"
"...뭐, 이 꼬맹아."
"꼬맹이는 무슨, 그냥 K라고 불러요 아저씨. 아무튼 왜 우리 이러고 있어요? 나갈 순 있어요?"
짜장면소스를 닦고 K와 김성식 그리고 조직원 몇과 함께 향한 곳은 서울 외곽의 공터였다. 정확히는 공터에 있는 조금 큰 컨테이너 사무실이었다. 쪽지를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과 연락이 닿았는데 자세한 것은 얼굴을 직접 보고 얘기한다는 말에 결국 이야기의 당사자인 K를 데리고 자리한 것이었다. 녀석이 혹시나 K의 얼굴을 모른다면 깔끔하게 죽여 입을 막으면 그만 이었고 아는 것이 있다면 잡아다 노구치에게 데려다 주면 되니 딱히 김성식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없었다. 김성식은 차에 조직원을 대기 시킨 뒤 K를 데리고 단둘이서 컨테이너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사고는 바로 그 순간 발생했다.
탕!
컨테이너 사무실에 들어가 앉을 곳을 찾던 중 유리와 둔탁한 것이 관통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K와 김성식이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중저음의 신음소리가 방금까지 그들과 함께있던 이의 거란 걸 알자마자 둘을 사무실의 문을 잠궜다. 재빠르게 훑어본 사무실엔 캐비넷이 양옆으로 각 3개씩 배열되어 있고 낡은 가죽 소파가 둘, 낮은 책상이 하나, 이름 모를 식물의 화분이 다섯, 그리고 털털털 움직이는 조금 큰 환풍기가 전부였다. 책상엔 어떤 상가와 관련된 서류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김성식과 K는 사무실의 가장 큰 위화감을 조우했다. 둘 모두에게 익숙한 향이 나서 시선을 내렸다. 낮은 테이블의 아래 진득한 암적색의 액체. 몸을 숙여 확인하니 일찍 방문한 손님의 총에 당했는지 두 눈을 채 감지도 못한 시신 한 구가 있었다. 아무래도 김성식에게 쪽지를 남긴 사람으로 보였으나 이유를 묻고 싶어도 이젠 물을 수 없게된 상황에 허탈함 마저 들었다. 김성식이 휙, K를 돌아봤다. 쪽지에 대한 건 차에서 들었으나 별 관심 없단 태도를 고수하던 K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럴 제기랄..."
당장 컨테이너 밖으로 나가면 총에 맞을 수 있었다. K가 환풍기를 발로 찼다. 텅, 텅, 텅. 세 번의 발길질에 결국 환풍기가 뜯겨져 나갔고 작은 체구의 성인이 지나갈 수 있을 법한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구멍은 워낙 높았고 중간에 몸이 낀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크기였다. 이 멍청한 놈이 무슨 작당이야?라는 시선으로 K를 보는 사이 본인은 전혀 성식에 대한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소파를 하나 가져와 아래에 두고 널려있던 수건 하나를 집어들어 암적색의 피에 적신 뒤 환풍구 주변을 문질렀다. 문지르던 수건을 이내 바깥으로 던지는 그 모습을 김성식이 기가 차다는 듯 보다가 가슴팍에 손을 넣었다. 총이라면 언제나 가지고 다녔기에 상대의 위치만 안다면 김성식은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다. 물론 위치를 알 수 있을리 만무했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에 빠진 성식의 손목을 K가 잡아 끌었다. 비어있는 캐비닛을 찾아 그곳으로 몸을 우겨 넣었다. 성식의 체형이 다소 마르긴 했으나 큰 체격의 K와 함께 비좁은 캐비닛에 들어가니 아무래도 꽉 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캐비닛의 문을 닫고 안에서 잠금 장치를 걸기까지 채 수십초가 지나지 않았다. 성식이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갑자기 철컥 하는 쇳소리가 났다. K를 노려보던 성식이 캐비닛의 좁은 틈 사이로 향했다.
"하 ... 발빠른 녀석이 있었군. 다 죽인 줄 알았더니. 쯧, 눈치가 빨라?"
밝게 퍼지는 빛이 강해서일까. 새까맣게 보이는 인영이 사무실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이 자식 때문에 괜히 일이 꼬였어. 응? 안 그래 형씨. 내가 그러길래 그 싼 입 간수 좀 잘하라고 했어 안했어? 에휴. 장어르신께서 경고했을 때 진즉 고갤 끄덕이고 납작 숙였으면 적어도 사고사로 편히 죽었을텐데 응? ... 아이고 나도 미쳤나. 대답도 못하는 시체한테 말을 다 걸고 말이야."
시체에게 한참 말을 걸던 남자는 총구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긁적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K가 발로차서 구멍을 낸 벽이었다. 수건으로 흔적을 만들어 둔 것을 살펴본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네. 장어르신께 보고하면 꽤 골치아프겠어. 형씨 하나때문에 나만 오늘 손해야 손해. 휴 ... 점심도 부실하게 먹었는데 이게 무슨 고생이람."
남자가 중얼거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시원스러운 발걸음으로 미련없이 컨테이너를 떠났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성식과 K는 10분 가량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서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은 채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캐비닛의 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닫힌 컨테이너의 사무실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남자는 영영 이곳을 떠난 듯 싶었다.
"뭐하는 녀석인진 몰라도 완전히 떠난 모양이군. 아까 차 엔진소리도 들렸고 말이지. 그나저나 꼬맹이, 꽤 머리를 쓰잖아?"
"꼬맹이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뭐, 저한테 빚 하나 지셨네요 아저씨. 그렇죠? 하하."
문제가 있었다면 둘의 자세가 워낙 좁은 곳에 얽매이듯 구겨넣어졌단 점이었다. 처음엔 기지를 발휘해 잠궜던 안쪽의 잠금장치를 풀 수 없게 되자 김성식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이나 수치, 그런 류의 감정 때문이 아닌 오직 증오와 분노 짜증으로 인한 변화였다. 금방이라도 건들면 고함소리가 닥칠 상황이었음에도 성식은 K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방금 자신의 허벅지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 미친자식이, 또라이라고 하도 말했더니 진짜로 또라이가 됐어?"
"아, 눈치 챘어요?"
K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눈만 내려서 성식을 보았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려치면 그것이 성식의 허벅지를 비비는 탓에 김성식이 기겁할 정도였다.
상황은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며 막을 내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성식의 위치를 염려한 조직원이 행적지를 물어 컨테이너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다. 조직원의 도움으로 둘은 무사히 캐비닛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조직원의 표정은 어두웠다. K에게 발산하지 못한 짜증이 애꿎은 조직원에게로 향한 것이다. 성식과 K를 구했음에도 애꿎은 잔소리만 배불리 얻어먹은 조직원이 동료 조직원의 시체를 트렁크에 실었다. 성식이 먼저 뒷좌석에 타고 조직원이 운전석에 탔다. 이어 K가 뒷좌석에 타려하자 김성식이 잽싸게 문을 잠궜다. 탁, 타닥. 잠긴 문을 여는 소리에 성식이 '흥'하며 콧방귀를 꼈다. 수차례 잠긴 문을 당기던 K는 결국 조수석으로 몸을 향했다. 그러나 성식의 예상과 달리 K는 조수석의 손잡이를 당기지 않고 창문을 두어번 두드렸다. 그 소리에 조직원이 조수석의 창문을 내렸다.
"잘 들어가시고 오늘 있었던 일은 다음에 마저 얘기하는 걸로 해요. 한동안 연락 안 될 거니까 놀라지 마시고. 계약한 건 음~ 두 달 뒤에 드릴거니 걱정마세요. 아저씨 마음씨 좀 곱게 쓰시고."
평소 같았으면 저 또라이가 또 무슨 헛소리야?라며 길길이 날뛰었을 성식이었으나 방금 전의 상황 때문인지 그저 꽉 쥔 주먹을 차 시트에 내리쳤다. 싸늘한 분위기에 조직원이 룸미러로 슬그머니 성식의 눈치를 봤다.
"뭘 봐! 얼른 출발이나 해!"
K는 건물 옥상의 난간에 몸을 반 쯤 기댄 채 턱을 괴고 있었다. 높은 고층이라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내려다본 거리는 개미만한 사람이 빼곡했다. 늦은 밤이라 빛나는 건물의 등이 마치 영원히 빛나는 폭죽처럼 보일 정도였다. K는 건너편 호텔의 불빛을 지긋이 보았다. 창 너머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잔을 들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노인은 앉은 채로 잔으로 목을 축였으나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 노인이 가만히 있어도 그를 찾는 이가 줄을 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가 노인과 대화할 순 없었다. 앞에 있는 분홍 머리의 여성이 몇 사람을 쳐냈다. 그러면 내쳐진 이가 화를 냈는데 이를 또 여자의 옆에 있던 매서운 사내가 처리하니 무슨 영화 속 장면 같았다. 늙은 노인에게 말이라도 붙이려는 사람과 이를 가려내는 왼 팔과 오른 팔.
K가 엄지와 검지만 펼치고 나머지 손을 접은 뒤, 마치 총을 쏘는 것처럼 노인을 향했다.
"빵!"
떠들썩한 빵 소리와 달리 노인은 여전히 기분나쁜 미소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기분 나쁜 늙은이야. 아저씨랑 닮긴 무슨."
오늘 K에게 있었던 일은 장희준 회장의 짓이었다. 최근 선진화파는 점점 장 회장의 일을 수락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나갔는데 이를 본보기 삼으려고 자금줄을 압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활동이 활발해진 선진화파를 보고 장 회준이 손을 쓴 것이었다. 컨테이너 사무실의 책상에 있던 서류는 K가 작업을 하던 건물 중 하나였다. 누군가 조사하는 낌새를 느껴 발걸음을 멈춘 곳이긴 했으나 장 회장의 조사력은 제법 예리했다.
"저 늙은이가 예리한건지 아니면 옆에 있는 저 누나가 첨예한건지."
도도한 표정으로 사람을 가려내는 여자를 보며 K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김성식이 짓밟고 더렵혀서 짜증내고 울게 하고 싶은 쪽이라면 여자는 반대였다. 자신에게 매달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아양이라면 그럴 것이고 애교라 해도 틀리지 않을 터였다.
"나도 여기 와서 진짜 또라이짓만 했더니 양다리 생각이나 하고, 이러면 안되는데. 아저씨가 알면 또 분기탱천 하겠다."
키득키득 거리는 웃음소리가 옥상 구석에서 들렸지만 곧 잠잠해졌다. 언제 사람이 있었냐는 듯 옥상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사람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옥상 너머의 호텔 창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가득했고 서울의 밤은 늘 그러하듯 빛무리가 늦은 시간까지 일렁였다.